7년 째 계속되는 시리아 내전으로 아동 24,000명을 포함한 민간인 약 207,000명이 사망 했다. 시리아는 7년 만에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난민이 발생한 나라가 되었다. 490만 명 이상이 강제로 집을 떠나 주변국가로 피난 했다. 알레포, 홈스, 다마스쿠스 등 대대적 공습과 화학무기 살상으로 완전히 파괴된 고향을 떠나 시리아 내 다른 지역으로 피난한 국내 난민도 630만 명에 이른다. 무려 1000만 명이 넘는 국내외 시리아 난민 중 50%가 18세 미만 아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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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봄호 기획특집, ‘I AM’은 이유도 모른 채 모든 것을 잃어 버린 아이들의 이야기, 그리고 아이들을 습격한 비극에 맞서는 어른들의 이야기다.

“커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제 꿈은 비행기 조종사예요.” “비행기 본 적 있어?” “네. 시리아에서 많이 봤어요. 전쟁 때요. 엄청 시끄럽고 무서운 비행기요.” “그렇게 무서운데 왜 비행기 조종사가 되고 싶어?” “멀리 그리고 높이 날아가고 싶어요. 제가 운전할 비행기는 안 무서운 비행기겠죠?”

하늘이 땅과 만나는 곳. 말 그대로 텅 비고 아득히 넓은 들, ‘광야’의 수평선 끝에 마치 신기루처럼 덩그러니 하얀 난민캠프가 놓여 있다. 비행기 조종사가 되고 싶은 사라(Sara, 11)는 여덟 살 때부터 피난생활을 전전하다 2년 전 이곳 난민캠프에 왔다. 사라가 살던 시리아의 도시 ‘홈스(Homs)’가 비행기 공습과 폭격의 최전선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 때 100만 인구가 살았던 홈스는 학교, 관공서, 도로, 수도, 집 등 도시를 90%를 잃었다. 사라의 집과 학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라가 비행기를 많이 보았던 것은 그리고 고향을 떠났던 것은 선택이 아닌 강요였고 생존이었다.

우리 위로 날아가던 비행기

우리 위로 날아가던 비행기

사라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동안, 난민촌 울타리 안 네모진 하늘 위로 비행기 3대가 굉음을 내며 날아갔다. “지금도 비행기 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콩닥거려요.”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TSD)를 남길 만큼 자신을 괴롭힌 비행기지만, 꼭 비행기 조종사가 되고 싶다던 당찬 아이.

사라를 만난 다음 날, 사라의 동생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아마도 사라는 난민캠프에서 태어난 막냇동생에게 난민캠프 너머의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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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의 전쟁이 끝난 세상.

동생과 골목길에서 뛰놀고 함께 학교에 다니며, 알록달록한 색깔의 집에서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는 평범한 세상을 말이다.

 

 


 

 

나는 오른쪽 귀가 들리지 않는
기타리스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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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11일 시리아에서 요르단으로 도망쳤어요. 너무 어렸을 때라 다른 기억은 없지만 한가지는 기억 나요. 제 오른쪽 귀에서 피가 나고 있었던 거요. 아마도 공습과 폭탄 소리가 너무 커서 귀를 다친 것 같아요. 지금도 오른쪽 귀가 들리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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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만(Haman, 13)은 엄마 그리고 3명의 형제와 함께 시리아를 탈출 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빠가 사라진 뒤였다. 사람들은 아빠가 군대에 끌려간 것이라 했다. 이미 삼촌과 이웃 아저씨 몇이 소리 없이 사라진 뒤였다. 하만의 아빠는 엄마에게 말하곤 했다. ‘혹시라도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아이들과 함께 안전한 곳으로 도망치라’고. 그렇게 5년이 흘렀지만 지금도 하만은 아빠의 생사를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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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몰랐던 작은 소년은 한 동안 실어증을 앓았다. 그림치료 시간에는 검은색으로만 그림을 그렸고, 월드비전 직원에게 “나중에 군인이 되어서 전쟁에 나갈 거다. 그래서 복수할거다”는 말을 되풀이 하곤 했다.

그랬던 하만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작년 1월, 월드비전 교육 센터에서 음악수업을 듣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제가 기타를 칠 수 있는지도, 노래를 할 수 있는지도 저는 몰랐어요. 월드비전 교육센터에서 처음으로 음악을 배웠어요. 월드비전 선생님이 제 목소리가 기타 소리와 잘 어울릴 것 같다며 기타 연주에 노래를 불러보면 어떻겠냐고 하셨어요.”

복수심에 가득 차 어두웠던 하만은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며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어느새 하만의 얼굴은 부드럽게 변해갔다.

복수심에 가득 차 어두웠던 하만은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며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어느새 하만의 얼굴은 부드럽게 변해갔다.

처음 접한 음악이었지만 하만은 금세 재능을 나타냈다. 매일 기타와 노래를 연습한 덕에, 얼마 전 자신과 같은 난민들을 위한 연주회를 열기도 했다.

“우리는 비명 소리나 폭탄 소리가 익숙한 아이들이에요. 같은 소리를 기억하는 친구들과 시리아에서 부르곤 했던 노래를 연주할 때면, 그 순간만큼은 마음이 편해요.”

폭력으로 닫힌 오른쪽 귀를 의식하듯, 그렇게 하만의 왼쪽 귀는 더욱 섬세히 평화의 선율을 담아 내고 있었다.

 

 


 

 

우리는 아이들의
비극에 침묵하지 않는
어른입니다

 

7년 간 이어진 기약 없는 전쟁으로, 전쟁 없는 삶을 살아본 적 없는 아이들이 생겨나기 시작 했다. 월드비전은 이 아이들의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 했다. 전쟁 같은 삶 밖에 기억할 것 없는 아이들에게 ‘전쟁이 아닌 삶’, 그리고 ‘전쟁이 끝나고 난 뒤의 삶’을 선물하고 싶었다. 눈앞에 폭탄이 떨어지고, 부모를 잃고, 사막 한 가운데로 내몰린 절망 가운데서도, 아이들이 큰 소리로 노래하고 신나게 뛰놀며, 전쟁 너머 세상을 꿈꿀 수 있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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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2017년 한 해, 월드비전은 아이들의 교육과 보호에 힘을 쏟았다. 요르단 아즈락 난민촌에 단 하나뿐인 유치원을 세웠으며, 축구장을 만들어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드라마, 음악, 미술 수업을 통해 아이의 다친 마음을 어루만졌고, 기술교육을 통해 자립심을 길러주려 노력 했다. 월드비전이라는 이름 아래 모인 수많은 어른들 덕에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다.

지금도 시리아에는 또 난민촌에는 ‘절망’, ‘비극’이라는 단어로 미처 다 담을 수 없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수십만 명의 아이들이 있다. 아이들의 삶에 찾아온 부당함에 침묵하지 않는 어른다운 어른, 청년다운 청년이 더 많아질 때 비로소 이 아이들의 전쟁 같은 삶은 끝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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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콘텐츠&커뮤니케이션팀 배고은
사진. 콘텐츠&커뮤니케이션팀 윤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