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없이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한국 사회. 그 안에서 도움이 필요한 아동들은 더 깊은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월드비전 ‘꿈꾸는아이들’사업은 국내의 꿈이 있는 아동, 청소년들이 자신이 처한 환경에 좌절하지 않고 희망을 가지고 도전하며 스스로의 삶을 개척할 수 있도록 돕는다. ‘가난하다고 꿈조차 가난한 것은 아님’에도 지레 꿈을 포기하거나 꿈꾸기를 거부하는 아이들에게 내일을 향해 도전하는 용기와 기회를 되찾아주는 월드비전 꿈꾸는아이들. 국토대장정은 꿈꾸는아이들사업 프로그램 중 하나로 올해 3회를 맞았다. 2018년 7월 30일~8월 3일, 열세 살 동갑내기 꿈꾸는아이들 291명은 삼척부터 서울까지 행군했다. 이 글은 뜨거운 햇살이 사정없이 내리꽂히던 길 위에서 만난 대견하고도 유쾌한 아이들의 기록이다.
3회
2018년 |
4박 5일
진행 일정 |
291명
국토대장정 |
60km
행군 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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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가 중요한가요
출정식의 비장한 선서를 뒤로하고 행군이 시작됐다.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조금씩 다리에 힘들다는 신호가 오는가 싶을 때 눈이 마주친 아이에게 대뜸 물었다. “완주할 자신 있어요?” 돌아온 대답은 “완주가 중요한가요? 선생님?” ‘집에 가고 싶다’ 정도의 반응을 짐작했기에 당황스러웠지만 최대한 담담하게 대꾸해주었다. “그러엄~. 중요하지! 완주하려고 온 거 아니야?” 아이는 뚝뚝 땀이 떨어지는데도 맑게 웃는다. “전 그냥요. 친구랑 걷는 데까지 걸으려고요. 끝말잇기 하면서 걸으니까 많이 힘들지도 않아요. 그러다 끝까지 걸으면 좋고, 아니어도 상관없어요.”
폭염으로 전국이 시끌시끌하던 2018년 7월의 마지막 주. 뜨거운 길 위에서 만난 아이에게 닳고 닳은 어른의 민낯을 들킨 것 같아 얼굴이 더 화끈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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떼굴떼굴 굴러서 갈 수 있다면
행군 첫날의 하이라이트를 꼽으라면 숙소로 향하는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의 조합 코스였다. 오르막길 정점을 찍고 다시 내리막길을 향할 때, 옆에서 걷던 아이가 말했다. “선생님, 떼굴떼굴 굴러서 가고 싶어요.” ‘그래, 선생님도 할 수만 있다면 몸을 동그랗게 말아버리고 싶구나.’라는 진심을 마음에 담아둘 수밖에 없었던 건 풀려버린 다리에 바짝 집중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다리 따로 몸 따로 휘청대는 아이들이 속출하는 와중에 친구의 배낭을 받쳐주는 아이, 선생님 괜찮으냐고 물어 오는 아이, 기수의 깃발을 대신 받아 드는 아이…. 예상치 못한 모습들이 여기저기서 눈에 띄었다. 첫날이라 살살 걷는 거라고 행군대장은 말했지만 더운 날씨 탓인지 뒤처지는 아이들도 생겼다. 드디어 숙소가 보이자 더 이상은 못 걷겠다 호소하던 아이가 내일 또 걸을 수 있다며 금세 함박웃음이다.
사진으로도 영상으로도, 물론 글로도 다 담아낼 수 없는 땀에 젖은 아이의 대견한 웃음은 그대로 ‘내 마음속에 저장’. 하루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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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 있으니까 힘이 나요
동해 코스를 행군한 둘째 날 오후에는 대전에서 올라온 두 소녀와 한참을 걸었다. 우리는 걸으니까 걸어야만 한다는 무아지경 속에 빠져 별다른 대화를 나눌 여유가 없었다. 완만한 평지에서 잠시 쉬는 시간, 소녀들에게 가벼운 인사를 건네보았다. “힘들지 않아요?” “오르다 보면 내려가는 길도 있으니까 힘들었다가 또 괜찮아지는 것 같아요. 더운 게 좀 짜증 나는데 끝이 있으니까 힘이 나요.” 아이가 조근조근 이야기를 들려주자 아픈 내 다리에도 힘이 나고 어쩐지 따듯한 기운이 돈다. 한창 사춘기여서 인터뷰 자체가 어려울 거라던 주변의 걱정이 무색하다(물론 시종일관 단답형으로만 대답을 하거나 다소 거친 말투에 흠칫 놀란 적도 있지만).
아이들은 서로를 돕고 배려하며 함께 목표를 향해 가는 성취감을 이 길 위에서 본능적으로 배워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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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나처럼 외로운 텅 빈 가슴 안고 사는구나
텁텁한 날씨 속에 계속되는 행군에 시끄럽던 아이들도 묵묵히 걷기만 한 시간이 있었다. 그 적막을 깨고 한 행군단원이 김건모의 <서울의 달> 후렴을 구성지게 불렀다. “오늘 밤 바라본 저 달이 너무 처량해~ 너도 나처럼 외로운 텅 빈 가슴 안고 사는구나~” 노래는 아이들의 숨소리와 함께 하늘로 솟아오르는 듯하다. 시끄럽다 말하는 아이도 하나 없다. ‘가사는 이해하지 못할 거야. 멜로디가 좋은가?’ 억지로 생각을 끌어내본다. 어쩌면 어른도 감당하기 힘든 상황과 부대끼고 있을지 모를 아이들이 외로움으로 텅 빈 가슴을 안고 잠들지는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행군 내내 아이들의 안전과 건강을 세심하게 살피며 보폭을 맞춰 걸었던 선생님과 자원봉사자처럼 좋은 어른들이 아이들 곁에 더 많이 서주면 좋겠다. 그러면 아이들이 덜 외로울 텐데, 정말 큰 힘이 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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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다고 달라지는 건 없겠지만
행군을 마친 마지막 날. 장기 자랑 프로그램을 앞두고 신이 난 아이들에게 마지막 소감을 물었다.
” 나는 그냥 걸었을 뿐인데 다른 친구들을 도왔다는 게 진짜 좋았어요.* 다른 사람을 돕는 건 아주 작은 일로도 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엄청 뿌듯하다는 걸 배웠어요. ”
정예준 *행군 넷째 날 아이들이 걸은 6km는 월드비전 글로벌 6K 캠페인에 기부되어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맑은 물을 선물했다. |
” 제 꿈은 미용사예요. 왜냐면요. 전 어릴 때부터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를 때 우리 엄마가 내 머리를 잘라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나중에 제 아이 머리는 내가 직접 해주고 싶어요. 언젠가 멋진 헤어스타일을 한 아이와 국토대장정에 같이 올래요! 하하하! ” 최우현 |
” 저는 완주를 했지만 돌아가면 아무것도 바뀌어 있지는 않잖아요. 하지만 국토대장정은 저를 바꿔주었어요. 친구들과 이야기하며 걷는 재미를 알게 해줬거든요.
친한 친구들과 꼭 다시 오고 싶어요. ” 김현우 |
현우의 말처럼 다시 돌아가는 일상은 달라질 게 없다. 이 길을 걸었다고 짠 하고 어려운 현실까지 변하진 않는다. 하지만 아이들은 다르다. 친구가 있어서 끝까지 걸을 수 있음을 알았다. 지쳐 주저앉아 있는 친구를 기다려주고, 일으켜 함께 앞으로 나아가는 기쁨이 무엇인지 알았으며, 자신들을 지켜주는 든든한 울타리가 있음을 깨달았다. 겁내지 말고 일단 부딪칠 수 있는 용기도 배웠다. 걷고 나서야 알게 된 것들이다. 걸어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국토대장정 참여 아동의 변화
글. 윤지영 후원동행2팀
사진. 편형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