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박상원이 만난 ‘24년의 기적, 난민에서 의사로’
“여러분께 전하고픈 이야기가 있어요.
어느 영화에 나오는 스토리가 아녜요.
우리 함께 만든 ‘기적’이죠.”
-박상원 월드비전 친선대사
24년 전,
제 삶의 첫 아프리카는
참혹함 그 자체였습니다.
전쟁으로 모든 것이 무너진
‘르완다’라는 나라였죠.
한동안 아이들의 눈망울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인도 쓰나미, 인도 지진, 동티모르 내전, 동아프리카 대기근까지. 월드비전과 함께 전 세계 곳곳의 긴급구호 현장을 다녀왔습니다. 20여 년의 긴 여정을 통해 ‘아이들의 삶에서 가난과 분쟁의 고리를 끊을 방법은 무엇일까?’란 고민에 대한 답을 찾았습니다. 바로 ‘교육’입니다. 더 많은 아이가 교육을 통해 꿈을 향해가길 바라며 움직여왔죠.
얼마 전 찾은 아프리카 말라위에서, 지난 24년의 여정에 대한 선물과도 같은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기적으로 저를 울린 ‘난민 출신 의사 미레일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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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길에 오른 3살 난민 소녀에서
생명을 구하는 여의사로”
100만 명의 무고한 죽음을 낸 1994년 르완다 내전. “3살 때라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시체가 강 위에 떠다니고 있었어요. 피와 총성이 가득한 길을 따라서 맨발로 4천 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무작정 걸었죠.” 그녀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모인 학생들 앞에선 미레일.
“아버지, 어머니를 잃고 고아가 된 채로 여러 나라를 거쳐 이곳 말라위까지 피난을 오게 됐어요. 8살 무렵이었을 거예요. 의지할 곳 없던 그때, 저와 같은 난민 아이들을 위한 난민캠프 학교에 가게 되었어요. 처음 연필을 손에 쥐었던 순간을 잊지 못해요.”
꿈을 향해 공부했던 아이. 전국 10등 안에 들 정도로 열심이었던 미레일은 장학생으로 학비를 지원을 받으며 중국 유학까지 다녀오게 됩니다. 그리고 2016년에 의사가 되었습니다.
“벌써 20년이 흘러 28살이 되었어요. 연약한 아이들을 치료하고 돌보는 의사가 되었죠. 살아갈 수 있는 음식과 옷, 보금자리뿐만 아니라 공부할 수 있는 학비까지. 수많은 분들의 도움이 저의 이야기를 비극에서 희망으로 바꿔주었어요.” – 28살 여의사, 미레일
“생명을 위협받던 작은 아이는
생명을 구하는 의사가 되었습니다.”
‘잘 살아주어 고맙다’
이 말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온몸으로 희망을 보여준 미레일.
제가 찾은 말라위에는
이런 기적이 필요한 아이들이
아직도 너무나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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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숯을 만드는 형제,
15살 베스탐과 13살 크리스토퍼”
적절한 의료지원을 받지 못해
병을 앓다 돌아가신 아빠와 엄마.
첫째 베스탐은 12살에 가장이 되었습니다.
4명의 동생을 돌보기 위해 아침과 저녁으로 숯을 만들고 파는 일을 합니다. 장작을 패고, 쌓고, 흙을 덮고. 불을 피워서 숯을 만들고 포대에 담기까지. 약 3~4주 정도의 시간이 걸립니다. 그렇게 만든 숯 한 포대는 우리 돈으로 약 2천 원(1,500콰차). 어린 가장 베스탐의 어깨에는 숯보다 무거운 삶의 무게가 놓여있습니다.
둘째인 13살 크리스토퍼도 형을 도와 일하죠. 하지만 HIV를 앓고 있어 오랜 시간의 노동은 크리스토퍼에게 치명적입니다. “제가 안 도우면 형 혼자서 더 힘들게 일해야 하잖아요.” 그런 동생의 모습에 형 베스탐은 더 속상해집니다.
교육만이 미래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형제는 공부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전교에서 2등을 할 정도로 열심인 베스탐. 굶지 않기 위해, 꿈을 지키기 위해 오늘도 형제는 숯을 만듭니다.
“숯 한 포대에 담긴 건,
오늘도 살아야 한다는 절박함과
내일은 나아질 수 있단 희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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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전 세계 구호 현장에서 아이들을 만났습니다. 삶이 변화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모습에 도저히 나눔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내 것을 나눈다고 작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나눌수록 더 커지는 것이 나눔이었습니다. 제가 전한 기적의 이야기. 그 이야기의 작가는 바로 여러분입니다.” – 박상원 월드비전 친선대사
아프리카 말라위를 찾은 배우 박상원의 이야기 |
글. 김유진 콘텐츠&커뮤니케이션팀
사진. 이영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