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은 땅, 그곳엔
얼마 전, 월드비전과 <희망TV SBS> 촬영차 케냐 투르카나 지역에 다녀왔습니다. 1회부터 함께한 프로그램이었고 아프리카엔 열 번도 넘게 다녀왔지만, 이번에 겪은 일들은 낯설고 충격적이었습니다.
수년간 이어진 동아프리카 기근이 그 땅에 죽음을 짙게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말라버린 땅 위엔 마른 생명만이
제가 처음으로 마주한 광경은 가뭄으로 말라버린 강줄기와 그 옆에 쌓여있는 수십 마리의 염소 무덤이었습니다. 사체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가운데 한 중년 남성이 망연자실해 있었습니다. 그가 일생을 바쳐 일군 200 마리의 염소가 그렇게 죽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당일 아침에 죽은 염소도 세 마리나 됐습니다. 염소에서 얻는 고기와 우유 등을 주식으로 삼으며 먹을 걱정 없이 지내던 가족은 당장 한 끼를 걱정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죽은 염소의 내장을 꺼내 먹고 있는 아이들과 그 옆에서 사체들을 태우는 오 남매의 아버지를 보며, 월드비전 친선대사이기 이전에 한 명의 아버지로서 제 마음도 한 줌의 재가 되는 듯했습니다.
아이에게 닥친 가뭄이란 현실
주로 목축으로 삶을 영위하던 이 지역에 가뭄은 그야말로 직격탄이었습니다.
가축은 죽고, 선인장까지 마르는 극심한 가뭄에 그곳에 가장들은 생계 수단을 잃었고, 아이들은 영양실조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남는 아이, 레이몬드.
생후 4개월 된 이 아이는 심각한 영양실조로 소리 내어 울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백일을 갓 넘긴 여느 아이였다면 한창 포동포동 살이 올랐어야 할텐데. 제 손가락보다 얇은 팔다리를 가진 레이몬드를 품에 안을 땐, 아이가 다칠까 유독 조심스러웠던 기억이 납니다. 엄마의 젖도, 영양식도 삼키지 못하고 토해내는 아이. 이 생명을 지키려면 링거액과 바늘이 필요하지만, 기근이 계속된 투르카나 지역 보건소에선 당장 레이몬드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현실이었습니다. 레이몬드와 같은 아이들이 그저 먹을 것이 없어, 먹을 물이 없어 죽어가는 현실. 그 ‘현실’이 너무도 무거워 한참 동안 먹먹한 가슴을 부여잡아야 했습니다.
절망 속 희망을 보다
‘이런 무거운 절망 가운데, 과연 내가 희망을 말 할 수 있을까.’
자신 없는 발걸음을 옮기며 만난 11살 릴리. 뜻밖에도 이 작은 소녀가 저에게 먼저 희망을 말했습니다. ‘먹을 거라곤 독성이 있는 야생 콩 뿐인데, 독을 없애려면 물이 필요하다’며 매일 12시간, 50km를 걸어 물을 긷는 소녀. 릴리가 아니면 아픈 할머니와 세 살배기 동생이 아무것도 먹을 수 없어 매일 맨발로 먼 길을 떠나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 하지만 그 절망의 길에서 릴리는 또렷한 눈망울로 희망을 말했습니다. ‘학교에 가고 싶다’고. ‘의사가 되고 싶다’고.
그 눈망울을 바라보며 제가 해줄 수 있는 거라곤 그 작은 어깨에 지어진 큰 짐을 잠시 들어주는 것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함께 한다면, 힘을 모아 그 무게를 덜어준다면, 릴리가 걷는 절망의 길은 희망으로 가는 길목이 될 것입니다. 릴리에겐 너무도 긴 이 절망의 시간이 언젠가 희망의 시간으로 바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마른 강에 다시 희망이 흐르도록
지금 이 순간에도 물 다음에는 염소가, 염소 다음에는 사람이 그 땅에서 사라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자꾸만 마음을 스칩니다. 잠시 머문 저조차도 그 위급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관심과 사랑이 지금 이 순간 절실한 이유입니다.
이전에 우리나라도 먹을 것이 없어 나무껍질을 벗겨 먹었던 시절이 있으나, 지금 이렇게 나아졌듯이 투르카나 사람들에게도 보다 밝고 풍요로운 미래가 있기를 진심으로 기대하고 응원합니다.
작은 모래알이 천천히 흘러 모래시계를 채우듯, 우리의 작은 희망이 모여 절망의 땅이 채워지는 기적을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글. 박상원 친선대사
사진. 최랑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