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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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 2018 봄호

I AM

분쟁피해지역을 말하는 ‘나’
분쟁피해지역에 답하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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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폭격기 말고 비행기 조종사가 되고 싶은 나는, 아이입니다.

7년 째 계속되는 시리아 내전으로 아동 24,000명을 포함한 민간인 약 207,000명이 사망 했다. 시리아는 7년 만에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난민이 발생한 나라가 되었다. 490만 명 이상이 강제로 집을 떠나 주변국가로 피난 했다. 알레포, 홈스, 다마스쿠스 등 대대적 공습과 화학무기 살상으로 완전히 파괴된 고향을 떠나 시리아 내 다른 지역으로 피난한 국내 난민도 630만 명에 이른다. 무려 1000만 명이 넘는 국내외 시리아 난민 중 50%가 18세 미만 아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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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봄호 기획특집, ‘I AM’은 이유도 모른 채 모든 것을 잃어 버린 아이들의 이야기, 그리고 아이들을 습격한 비극에 맞서는 어른들의 이야기다.

“커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제 꿈은 비행기 조종사예요.” “비행기 본 적 있어?” “네. 시리아에서 많이 봤어요. 전쟁 때요. 엄청 시끄럽고 무서운 비행기요.” “그렇게 무서운데 왜 비행기 조종사가 되고 싶어?” “멀리 그리고 높이 날아가고 싶어요. 제가 운전할 비행기는 안 무서운 비행기겠죠?”

하늘이 땅과 만나는 곳. 말 그대로 텅 비고 아득히 넓은 들, ‘광야’의 수평선 끝에 마치 신기루처럼 덩그러니 하얀 난민캠프가 놓여 있다. 비행기 조종사가 되고 싶은 사라(Sara, 11)는 여덟 살 때부터 피난생활을 전전하다 2년 전 이곳 난민캠프에 왔다. 사라가 살던 시리아의 도시 ‘홈스(Homs)’가 비행기 공습과 폭격의 최전선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 때 100만 인구가 살았던 홈스는 학교, 관공서, 도로, 수도, 집 등 도시를 90%를 잃었다. 사라의 집과 학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라가 비행기를 많이 보았던 것은 그리고 고향을 떠났던 것은 선택이 아닌 강요였고 생존이었다.

우리 위로 날아가던 비행기

우리 위로 날아가던 비행기

사라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동안, 난민촌 울타리 안 네모진 하늘 위로 비행기 3대가 굉음을 내며 날아갔다. “지금도 비행기 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콩닥거려요.”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TSD)를 남길 만큼 자신을 괴롭힌 비행기지만, 꼭 비행기 조종사가 되고 싶다던 당찬 아이.

사라를 만난 다음 날, 사라의 동생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아마도 사라는 난민캠프에서 태어난 막냇동생에게 난민캠프 너머의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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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의 전쟁이 끝난 세상.

동생과 골목길에서 뛰놀고 함께 학교에 다니며, 알록달록한 색깔의 집에서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는 평범한 세상을 말이다.

 

 


 

 

나는 오른쪽 귀가 들리지 않는
기타리스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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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11일 시리아에서 요르단으로 도망쳤어요. 너무 어렸을 때라 다른 기억은 없지만 한가지는 기억 나요. 제 오른쪽 귀에서 피가 나고 있었던 거요. 아마도 공습과 폭탄 소리가 너무 커서 귀를 다친 것 같아요. 지금도 오른쪽 귀가 들리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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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만(Haman, 13)은 엄마 그리고 3명의 형제와 함께 시리아를 탈출 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빠가 사라진 뒤였다. 사람들은 아빠가 군대에 끌려간 것이라 했다. 이미 삼촌과 이웃 아저씨 몇이 소리 없이 사라진 뒤였다. 하만의 아빠는 엄마에게 말하곤 했다. ‘혹시라도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아이들과 함께 안전한 곳으로 도망치라’고. 그렇게 5년이 흘렀지만 지금도 하만은 아빠의 생사를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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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몰랐던 작은 소년은 한 동안 실어증을 앓았다. 그림치료 시간에는 검은색으로만 그림을 그렸고, 월드비전 직원에게 “나중에 군인이 되어서 전쟁에 나갈 거다. 그래서 복수할거다”는 말을 되풀이 하곤 했다.

그랬던 하만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작년 1월, 월드비전 교육 센터에서 음악수업을 듣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제가 기타를 칠 수 있는지도, 노래를 할 수 있는지도 저는 몰랐어요. 월드비전 교육센터에서 처음으로 음악을 배웠어요. 월드비전 선생님이 제 목소리가 기타 소리와 잘 어울릴 것 같다며 기타 연주에 노래를 불러보면 어떻겠냐고 하셨어요.”

복수심에 가득 차 어두웠던 하만은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며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어느새 하만의 얼굴은 부드럽게 변해갔다.

복수심에 가득 차 어두웠던 하만은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며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어느새 하만의 얼굴은 부드럽게 변해갔다.

처음 접한 음악이었지만 하만은 금세 재능을 나타냈다. 매일 기타와 노래를 연습한 덕에, 얼마 전 자신과 같은 난민들을 위한 연주회를 열기도 했다.

“우리는 비명 소리나 폭탄 소리가 익숙한 아이들이에요. 같은 소리를 기억하는 친구들과 시리아에서 부르곤 했던 노래를 연주할 때면, 그 순간만큼은 마음이 편해요.”

폭력으로 닫힌 오른쪽 귀를 의식하듯, 그렇게 하만의 왼쪽 귀는 더욱 섬세히 평화의 선율을 담아 내고 있었다.

 

 


 

 

우리는 아이들의
비극에 침묵하지 않는
어른입니다

 

7년 간 이어진 기약 없는 전쟁으로, 전쟁 없는 삶을 살아본 적 없는 아이들이 생겨나기 시작 했다. 월드비전은 이 아이들의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 했다. 전쟁 같은 삶 밖에 기억할 것 없는 아이들에게 ‘전쟁이 아닌 삶’, 그리고 ‘전쟁이 끝나고 난 뒤의 삶’을 선물하고 싶었다. 눈앞에 폭탄이 떨어지고, 부모를 잃고, 사막 한 가운데로 내몰린 절망 가운데서도, 아이들이 큰 소리로 노래하고 신나게 뛰놀며, 전쟁 너머 세상을 꿈꿀 수 있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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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2017년 한 해, 월드비전은 아이들의 교육과 보호에 힘을 쏟았다. 요르단 아즈락 난민촌에 단 하나뿐인 유치원을 세웠으며, 축구장을 만들어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드라마, 음악, 미술 수업을 통해 아이의 다친 마음을 어루만졌고, 기술교육을 통해 자립심을 길러주려 노력 했다. 월드비전이라는 이름 아래 모인 수많은 어른들 덕에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다.

지금도 시리아에는 또 난민촌에는 ‘절망’, ‘비극’이라는 단어로 미처 다 담을 수 없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수십만 명의 아이들이 있다. 아이들의 삶에 찾아온 부당함에 침묵하지 않는 어른다운 어른, 청년다운 청년이 더 많아질 때 비로소 이 아이들의 전쟁 같은 삶은 끝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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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지키는
긴급구호사업 후원하기

 

 

글. 콘텐츠&커뮤니케이션팀 배고은
사진. 콘텐츠&커뮤니케이션팀 윤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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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이들을 정당한 출발선으로 이끄는 어른입니다

오다이, 이나스. 두 사람과 함께 난민캠프를 걷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 발짝을 땔 때 마다 걸음을 멈추게 하는 아이들의 인사와 하이파이브 때문이다. 시리아 난민을 위한 아즈락 난민캠프가 생긴 이래, 아이들의 전쟁 같은 삶 속 유일한 안식처가 되어준 두 사람. 아이들이 겪는 부당한 현실에 맞서고, 아이들을 정당한 출발선으로 이끄는 두 어른을 만나보았다.

이나스 알파즈 : 월드비전 시리아 긴급구호 교육사업 담당자 오다이 알자와레 : 월드비전 시리아 긴급구호 아동보호사업 담당자

 

Q. 난민캠프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두 분, 자기소개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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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스

난민캠프 아이들은 신호등을 몰라요. 세상에 코끼리나 돼지 같은 동물이 있다는 것도 모르죠. 한번도 본적이 없으니까요. 난민캠프에서는 정착을 막기 위해 농사를 짓지 못하게 되어 있어서, 씨앗을 심으면 열매를 맺는다는 자연의 순리도 가르치기 쉽지 않아요. 전쟁이 길어지면서 난민캠프에서 태어나 난민캠프에서만 자란 아이들도 있어요. 전쟁이 끝나고 이 아이들이 난민캠프를 떠나 세상으로 돌아가면, 과연 스스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적어도 제가 가르치는 아이들은 그랬으면 좋겠어요. 안녕하세요. 저는 그 꿈을 품은, 시리아 난민을 위한 아즈락 난민캠프의 유일한 유치원 ‘월드비전 유치원’ 원장 이나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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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이

눈 앞에서 가족이 죽고 학교가 폭파되어 하루아침에 친구를 잃은 처참한 경험을 한 아이들. 이 아이들을 다시 웃게 하는 작은 물건이 있습니다. 바로 축구공이죠! 안녕하세요. 아즈락 난민캠프 축구리그에서 당당히 1등 팀을 배출한 ‘월드비전 로열 FC’ 감독 겸 아동보호사업 담당 오다이입니다.

 

 

Q. 동물과 식물, 신호등을 모르는 아이를 상상도 못했어요. 이 아이들은 어떻게 가르치나요?

이나스

저는 유아교육을 전공해 일반 유치원에서 교사 생활을 했는데요. 난민캠프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 전까지 몰랐던 사실이 있어요. 바로 난민캠프 밖 아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배움의 기회라는 거예요. 매일 건너는 신호등의 색깔, 울려 퍼지는 캐럴, 엄마의 심부름∙∙∙. 유치원에 다니지 않더라도 생활 그 자체가 아이들에게는 삶을 살아가는 기초 교육이 되죠. 모든 것이 차단된 난민캠프 안에서 자란 아이들은 그렇지 않아요.

사막 한 가운데 놓인 아즈락 난민캠프 전경

사막 한 가운데 놓인 아즈락 난민캠프 전경

당연히 알고 있을법한 개념부터 찬찬히 가르쳐야 해요. 월드비전이 이곳에 첫 번째 유치원을 세운 후 아이들은 처음으로 작은 정원에서 씨앗을 심어 보았고, 악기를 연주했고, 바다와 물고기에 대해 알게 됐어요. 유아 시기에 배우는 너무도 당연한 이런 활동은 아이가 평생 살아갈 자산이 되기 때문에 무엇보다 중요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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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캠프 유치원의 작은 정원에서 허브 씨앗 발아에 대해 배우고 있는 아이들

바다에 사는 물고기를 만들어보는 미술 시간

바다에 사는 물고기를 만들어보는 미술 시간

오다이

맞아요. 우리는 별 것 아닌 평범한 하루하루가 난민 아이들에게는 ‘빼앗긴 일상’이죠. 사막 한가운데 세워진 삭막한 난민캠프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초록색은 월드비전이 지은 이 축구장뿐이에요. 체육 선생님과 함께하는 축구, 농구, 달리기, 줄다리기 시간은 아이들이 난민이란 아픔을 잊고 아이다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죠. 전쟁에 대한 기억으로 무기력, 우울증,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아이들이 체육 활동을 통해 호전된 사례도 많아요.

아즈락 난민캠프의 유일한 초록색, 월드비전 축구장

아즈락 난민캠프의 유일한 초록색, 월드비전 축구장

축구장에서 아이다운 웃음을 되찾아가는 아이들

축구장에서 아이다운 웃음을 되찾아가는 아이들

 

이나스, 오다이

축구공 하나가, 작은 정원이 - 함께 부르는 노래가 난민캠프 아이들이 웃을 수 있는 유일한 이유이기에. 전쟁이 끝난 후 아이들의 일상을 지켜줄 울타리가 될 것이기에, 우리는 이 일을 계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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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차게 노래하며 스트레스를 날려버리는 아이들

힘차게 노래하며 스트레스를 날려버리는 아이들

아이들에게 찾아온 불행에 맞서 그 부당한 출발선을 외면하지 않는 우리 그리고 여러분은 멋진 어른입니다.

힘이 있는 어른보다, 힘이 되는 어른이 되어주세요.

아이를 지키는
긴급구호사업 후원하기

 

 

글. 콘텐츠&커뮤니케이션팀 배고은
사진. 콘텐츠&커뮤니케이션팀 윤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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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와 호날두를 꿈꾸는 난민캠프 최고의 라인업

“메-시, 수아레~즈, 이니에스타!”

“로날도(호날두), 베일, 벤제마!”

좋아하는 축구 선수를 묻자 경쟁하듯 이름을 외치는 영락 없는 아이들. 아즈락 난민캠프의 메시와 호날두를 꿈꾸는 MVP 스트라이커, 아마드(Ahmad, 13)와 함자(Hamza, 12)의 연습 경기를 찾았다.

경기가 시작되자 함자가 화려한 팬텀 드리블을 시전하더니 골키퍼와 일대일 찬스를 만들어 시원하게 논스톱 선제골을 뽑아낸다. 관중석에서는 함성이 터진다.

상대 선수 두 명을 따돌리는 함자의 드리블

상대 선수 두 명을 따돌리는 함자의 드리블

이에 질세라 아마드 역시 기막힌 각도의 감각적 헤딩슛으로 함자를 바짝 따라 잡는다. 그렇게 함자 2골, 아마드 3골, 2:3으로 연습경기의 승리는 아마드 팀에 돌아 갔다.

몸을 날려 공을 차는 아마드

몸을 날려 공을 차는 아마드

관중의 눈을 즐겁게 하는 두 스타 플레이어는 50개 NGO 축구팀이 참가한 아즈락 난민캠프 축구리그 우승팀, ‘월드비전 로열 FC’ 소속이다. 투톱 스트라이커 아마드와 함자가 팀의 우승을 이끌었다.

아즈락 난민캠프 리그 우승팀, 월드비전 로열 FC. 월드비전은 난민캠프 운동공간(Play Space)을 만들어 축구, 농구, 육상 등 아이들의 체육 활동을 지원하고 아이들의 몸과 마음을 보듬는다.

아즈락 난민캠프 리그 우승팀, 월드비전 로열 FC. 월드비전은 난민캠프 운동공간(Play Space)을 만들어 축구, 농구, 육상 등 아이들의 체육 활동을 지원하고 아이들의 몸과 마음을 보듬는다.

 


 

 

한없이 씩씩하고 빛나는 아이들이지만, 사실 두 소년에게는 잊지 못할 아픈 기억이 있다.

 

“폭탄이 떨어지고 군인들이 사람들을 죽이니까 입고 있던 옷 그대로 아무것도 없이 시리아를 탈출 했어요. 2014년에요. 우리가 이 난민캠프에 온 9번째 가족이었어요.”
-함자-

“저도 트럭을 타고 왔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겹치고 뭉개졌어요. 이렇게요.”
-아마드-

덜덜 떨리던 순간과 겹치고 뭉개진 사람들을 손짓까지 해가며 자세히 설명하는 아이들에게 어린나이에 겪은 일이 이렇게 다 기억나냐고 묻자, “어떻게 잊을 수 있어요?”라고 말하는 두 소년.

“그래도 공을 차기 시작하면 슬프고 끔찍했던 기억이 축구공과 함께 뻥~ 날아가는 기분이에요.”
-아마드-

골을 넣은 함자가 카메라로 달려와 세레모니를 해주었다.

골을 넣은 함자가 카메라로 달려와 세레모니를 해주었다.

“월드비전 코치님이 항상 말해요. 축구는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팀플레이 스포츠라고요. 그래서 축구가 좋아요. 많은 분들이 시리아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셔서 우리가 이 축구장에서 멋진 코치님과 축구를 배울 수 있는 것처럼, 저희도 나중에 난민 아이들을 가르치는 유명한 축구 선수가 될 거에요.”
-함자-

바람을 가르며 축구공을 향해 달리는 함자

바람을 가르며 축구공을 향해 달리는 함자

 


 

 

인터뷰를 마친 뒤, 두 예비 선수의 싸인을 받으며 상상 했다. 몇 년 뒤, 스포츠 뉴스 1면에서 레알 마드리드 아마드와 FC 바르셀로나 함자를 볼 그날을. 그리고 이 인터뷰가 많은 난민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역사적인 인터뷰로 기억될 그 날을 말이다.

두 예비 축구선수들의 싸인이 희망의 증거가 될 날을 꿈꾸며

두 예비 축구선수들의 싸인이 희망의 증거가 될 날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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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아동들의 꿈을 응원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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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콘텐츠&커뮤니케이션팀 배고은
사진. 콘텐츠&커뮤니케이션팀 윤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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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사업보고서

2017년 한 해 동안 전세계 구석구석 달려갔던 모든 곳에
월드비전과 후원자님이 정성을 기울여 돌본 열매를
이 곳에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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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을 든 아이들, 소년병 근절을 위해 당신의 목소리가 필요합니다

“죽을래? 죽일래?”

하인(Hain)은 죽을 것인지, 죽일 것인지 선택해야 했던 기억을 고통스럽게 끄집어 냈다. 그는 16살 때 미얀마에 있는 무장 단체에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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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또래 아이들을 총으로 쏴야 했어요. 저보다 어린 아이들도 있었죠. 그 때를 생각하면 잠을 잘 수가 없어요. 먹지도 못하겠고, 제가 계속 살아도 될지 모르겠어요.”

 


 

“어느 날 어떤 사람이 학교에 보내주겠다며, 돈을 벌게 해주겠다며 일자리를 소개시켜준다고 해서 쌍둥이 동생과 함께 따라갔어요. 도착한 곳은 무장단체가 있는 숲 속이었어요. 다시 돌아가려고 했는데, 돌아가면 저를 죽이겠다고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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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걱정하지 마. 내가 너와 함께 있어”라는 벽의 문구가 사라를 위로하는 듯하다.

 

그렇게 소년병으로 끌려간 사라(Sarah)는 전쟁터에서 지뢰에 오른쪽 다리를 잃었고, 그녀의 쌍둥이 동생은 목숨을 잃었다. 사라는 전쟁에 참가했을 뿐 아니라, 여자라는 이유로 무장단체를 위한 가사 노동에 동원되었으며, 성폭력에 시달렸다.

 


 

 “학교에 다닐 수 있게 해줄게”

“절대 굶지 않게 해줄게”

“너희 가족을 지켜줄게”

무장 단체는 이런 거짓말로 분쟁과 가난으로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생계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을 유혹한다. 한 가닥 희망이 필요 했던 아이들은 이 거짓말에 속아, 목숨을 포기하는 것 밖에 선택할 수 없는 죽음의 길로 끌려가게 된다. 이 과정에서 특히 여자 아이들은 성 착취를 당해 원치 않는 아이를 낳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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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2일은 소년병 반대의 날(Red Hand Day or International Day against the Use of Child Soldiers)이다. 어떤 아이도 어른들에 의해 전쟁터로 나가서는 안 된다고 전 세계가 목소리를 모으는 날이다. 무력 분쟁에서의 아동 가담에 관한 아동권리 협약 의정서(Optional Protocol to the Convention on the Rights of the Child on the Involvement of Children in Armed Conflict)는 아동이 무력 분쟁에 가담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도 다른 대안이 없는 취약한 아이들이 소년병의 타겟이 되고 있다.

 

소년병 근절을 위해서는 실효성 없는 협약을 넘어선 실질적인 행동이 필요하다. 소년병 반대의 날을 맞아 월드비전은 국제사회에 아래와 같은 실질적인 행동을 요구한다.

1. 군인 모집 최소 연령을 18세로 제한해야 한다. 많은 국가에서 병력의 최소 연령이 16살이나, 18살로 규정 연령을 제한할 것을 촉구한다.

2. 아동이 군 병력으로 차출 되지 않도록 아동에 대한 경제, 사회적 보호를 제공해야 한다. 교육과 일자리를 제공하겠다는 약속이 입대의 이유가 될 수 없도록 해야 한다.

3. 출생 신고 제도를 확립하고 관리해야 한다. 이를 통해 취약한 아이들이 흔적도 없이 군대로 끌려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4. 소총의 유통을 정밀하게 관리해야 한다. 저렴하고 접근성이 높으며, 작고 가벼운 소총의 특성을 이용해 무장 단체가 아이들을 쉽게 훈련 시키는 것을 예방해야 한다.

5. 아이들이 분쟁에 노출되지 않도록 무력 분쟁을 예방하고, 평화적인 결과를 도출하는 데 투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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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비전은 국제사회와 함께 끊임 없이 목소리를 낼 것이며, 소년병 피해 아동을 위한 통합적 사업을 계속해나갈 것이다.

 


 

트라우마로 고통 받는 아이들을 감싸는 보호 활동

월드비전은 무장 단체로부터 도망친 아이들을 위한 상담소(helpline)와 가족을 찾을 수 없는 아이들을 위한 임시 보호소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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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다양한 심리치료활동을 통해 아이들의 아픔을 치료하는 재활센터를 운영한다. 같은 경험을 한 또래 집단과의 상담 세션, 그림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미술 치료 활동 등은 아이들이 겪는 극심한 심리 문제를 해결하는데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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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치료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아이들

 


 

소년병이 아닌 소년으로, 청년으로

교육을 받게 해주겠다는 거짓말에 끌려간 소년병 피해 아동들은 교육을 받아야 할 10대 시기를 학교가 아닌 전쟁터에서 보낸다. 때문에 목숨을 걸고 탈출에 성공한다 해도 아이들에겐 생계를 이어나갈 기술이나 자산이 전혀 없다. 월드비전은 이 아이들이 다시 지역사회로 돌아왔을 때, 직업을 가지고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기초 교육 및 직업훈련을 제공하고, 민간부문과 연계해 재활 일자리를 창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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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비전 리바운드 센터(재활센터)는 위안부로 일했던 여아들을 포함한 소년병에게 바느질, 요리, 정비 등의 직업훈련을 제공한다.

 


 

예방이 최선의 방어

월드비전은 분쟁이 끝나고 평화가 시작될 수 있도록 평화의 주체인 아이들과 함께 정부와 지역사회에 끊임 없이 목소리를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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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를 향한 평화 캠페인을 진행하는 월드비전과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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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병 1,000명 구출 그리고∙∙∙

월드비전의 지속적인 소년병 근절 활동의 결과로 2018년 2월 7월, 내전 중인 아프리카 남수단에서 1차로 300명이 넘는 아이들이 풀려났다. 앞으로 700명 정도의 아이들이 추가적으로 풀려날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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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수단 내전에 가담한 무장단체에 끌려가 1년 간 정보원으로 활동해야 했던 빅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함께 목소리를 모은다면 희망은 있다. 앞으로도 월드비전은 더 많은 소년병이 구출될 수 있도록, 또 빼앗긴 어린시절을 되찾고 자립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아이의 손에 총 대신, 연필을, 책을, 희망을, 꿈을 쥐어주는 이 일은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소년병 이슈에 대해 알게 되고, 함께 힘을 모을 때 가능할 것이다.

 

소년병 후원을 통해 아이가 총 대신 희망을 들 수 있게 해주세요.

긴급구호사업후원하기

 

 

글. 콘텐츠/커뮤니케이션팀 배고은
사진. 월드비전

▼ 이 이야기를 공유해 소년병 근절을 위한 목소리를 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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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지내?’ 우리 안부를 물어요 – 최강희의 두번째 아프리카

“자신 있었어요. 두 번째 아프리카니까 ‘이번에는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야지’ 하는 의욕도 넘쳤고, ‘내가 아이들을 좋아하는구나’하는 내면의 자신감도 있었죠.”

“그런데요?”

“그런데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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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리는 마음으로 첫 아프리카를 만난지 꼭 1년. 배우 최강희는 ‘월드비전 홍보대사 최강희’가 되어 한껏 자신 있게 두 번째 아프리카로 향했다. 그런데 그 자신감은 금새 사라져버렸다.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그녀의 두 번째 아프리카, 남수단 난민촌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느껴지지 않았어요

5년 째 내전 중인 남수단에 갔어요. 첫 날, 한 병원을 찾았는데 이상하게도 그곳 사람들의 아픔이 느껴지지 않는 거예요. 난민촌에 갔을 때도, 사람들이 슬퍼 보이지 않았고, 고통스러워 보이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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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들의 아픔을 한국에 잘 전달해야 더 도움이 될텐데’하는 부담감이 얇은 막이 되어 제 마음과 눈을 가렸어요. ‘‘더 자극적인’ 이야기는 없나’하는 제 내면을 마주 했을 땐,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제 자신이 실망스럽고 밉기까지 하더라고요. 그때부터 자신감은커녕 걱정이 밀려오기 시작 했어요.

 

 

그냥 웃게 해주자

‘나에게 공감의 마음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통로가 될 수 있을까.’ 무거운 마음으로 뒤척이던 밤, 친구에게 문자가 왔어요.

‘잘 지내? 별일 없지?’

별거 아닌 말이었는데, 고마운 거에요. 누군가가 나의 안부를 물어준다는 것 만으로 힘이 나더라고요. 저는 ‘나만 잘하면 된다’고(웃음) 답장을 했는데, 친구의 대답이 이거였어요.

‘강희, 네가 할 수 있는 거 별거 없잖아~
그냥 아이들보면 웃게 해줘. 그러고 와’

그제서야 ‘내가 웃는 사람과 함께 웃지 못하고, 우는 사람과 함께 울지 못했구나’ 깨달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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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부터 부담감을 내려 놓고 아이들을 대했어요.

‘잘 지내니?’

‘밥은 먹었어?’

‘아픈 데는 없고?’

진심을 담아 물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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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이름을 묻고, 이름을 부르고, 눈을 맞추었어요.

그렇게 안부를 물었을 뿐인데, 고맙게도 아이들이 웃어주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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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웃음이 웃음으로 보이기 시작 했고, 슬픔이 슬픔으로 보이기 시작 했어요. 경계와 무기력함이 묻어나던 아이들의 표정이 서서히 풀어지더니, 아이들의 이야기 보따리도 풀리기 시작 했어요.

 

 

아이들의 이유 있는 이야기

이 아이는 10살 아콧(Akot) 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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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으로 부모를 잃고 동생 3명을 돌보고 있어요.

201711_story_sbshope_08“복수할까 봐 남자아이들은 모두 죽여요.
그래서 지난 5월 집을 떠나 동생들과 이곳으로 도망쳤어요.”
(아콧, 10살)

 

아콧은 외로워 보였어요. 이곳에서도 고향에서도 환영 받지 못하니까, 작은 소일거리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팔에 난 큰 상처는 배가 고파 남의 밭에 떨어진 수수대를 주워 먹다 밭 주인의 아들에게 물린 거래요.

그 상처를 치료해준다고 제가 알콜솜으로 닦아 내는데, 이 아이가 숨소리도 내지 않는 거예요.

나중에 물어보니, ‘아프다고 하면 치료받을 기회를 놓칠까 봐’ 그랬다더라고요.

그때 아콧의 상처가 보였어요. 눈에 보이는 상처 말고, 내전으로 깊게 팬 마음의 상처요. 우리가 너무 큰 충격을 받으면 소리를 낼 수 없듯이, 이 아이들도 그런거예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그 상처를 꼭 보듬어 주는 것이었어요.

 

 

누군가에게 힘이 된다는 건.

아프리카의 마지막 날. 루알(Lual, 6), 아욕(Ayok, 4), 뎅(Deng, 3), 콘딕(Condic, 1), 4남매를 키우는 에족(Ajok)을 만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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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에 휘말린 남편을 고향에 두고, 4남매와 함께 낯선 땅으로 온 그녀. 본인의 몸에서는 30분마다기생충이 나오고, 아이들은 모두 아프고, 사는 집에서는 쫓겨날 처지였어요. 여기까지만 해도 너무 큰 고통인데, 에족이 그러는 거예요.

“강희, 사실 어제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아이들과 함께 죽으려고 했어요. 근데 당신이 나를 찾아온 거에요. 이 세상에 혼자 남겨진 나에게, 당신이 물어준 거에요. 아픈 데는 없느냐고, 마음은 괜찮냐고, 아이들 학교는 다니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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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_story_sbshope_11저는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데, 그저 찾아가서 안부를 물었을 뿐인데∙∙∙. 그것만으로 죽음이 생명으로 바뀔 수 있는 거구나.

사람들의 인생을 드라마틱하게 바꿔주겠다는 욕심으로 찾은 저의 두 번째 아프리카가 저에게 말했어요.

누군가를 돕는다는 건 사실 ‘너와 함께 걷는 사람이 있어’를 느끼게 해주는 거라고. 그래서 네가 이곳에 온 거라고.

아무리 힘들어도 나를 믿어주는 한 사람이 있으면 우린 버틸 수 있잖아요. 누군가를 돕는 건 내가 그 한 사람임을 알려주는 것, 아닐까요?

‘잘 있냐고’, ‘괜찮냐고’, 안부를 묻는 것에서부터 희망이 시작될 거라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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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비전과 함께하는 <희망TVSBS>를 통해 더 많은 최강희와 아이들의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11월 17-18일(금-토), SBS

글. 배고은 커뮤니케이션팀
사진. 이용대 사진작가

긴급구호 정기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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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바 섬의 ‘세상에서 가장 비싼 장례식’

아름다운 옥빛 해변이 떠오르는 인도네시아 발리. 그 곳에서 다시 자그마한 프로펠러 비행기로 갈아타고 세 시간쯤 날아가면 숨바 섬이 있습니다.

숨바 섬으로 데려다 줄 비행기와 아름다운 숨바 섬

숨바 섬으로 데려다 줄 비행기와 아름다운 숨바 섬

 

“장례식만 하면 가난해져요”

전통을 중요시하는 숨바 섬 사람들. 심지어 일부 지역에는 주인과 노예로 나뉘어진 계급 관계가 그대로 남아있기도 합니다. 이들은 특히 집안의 경조사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그 중에서도 가족 중 누군가가 세상을 떠났을 때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러야 고인에 대한 예를 다 하는 것이고 후손들의 삶도 풍성해 진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통에 따르면 장례식은 한 달 이상 치러지고 찾아오는 손님들을 매번 극진히 대접해야 하기 때문에 아주 많은 가축을 잡아야 합니다. 찾아오는 손님들도 부의금 명목으로 가축을 가져와야 해서 마을 전체에도 매우 큰 부담이 됩니다. 사회계급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장례식을 한 번 치르는데 수 십 마리의 가축(돼지, 말, 소)와 음식이 필요하기 때문에 $5,000 이상이 필요합니다. 인구의 22% 이상이 하루 $1.25 미만으로 생활하는 숨바 섬 주민들에게 이 비용은 매우 무거운 짐이고 실제로 평균적으로 소득의 50% 이상을 이런 경조사에 쓴다고 합니다.

전통에 따른 장례식에는 손님들을 대접하기 위해 아주 많은 가축이 필요합니다

전통에 따른 장례식에는 손님들을 대접하기 위해 아주 많은 가축이 필요합니다.

이런 상황이니 당연하게도 아이들의 교육이나 건강에 쓸 수 있는 돈을 마련하기 어렵고 심지어는 연달아 있는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빚을 내고 그 빚이 자녀들에게 대물림 되어 빈곤의 굴레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과거가 미래를 삼켜버리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처럼 빈곤의 원인은 기근이나 자연재해처럼 아주 쉽게 눈에 띄는 경우도 있지만 사회 제도나 문화적인 요인처럼 외부인이 발견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 월드비전 사업의 핵심은 바로 지역주민들과 함께 일하며 빈곤의 원인을 발견하고 해결책을 찾아가는데 있습니다. 인도네시아 숨바 섬의 아이들에게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주기 위해 주민들과 월드비전이 함께 해온 장례문화간소화 사업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주민들을 만나는 월드비전 직원들

주민들을 만나는 월드비전 직원들

2014년에 장례문화 간소화를 선언한 콤바파리(Kombapari) 마을의 원로들

2014년에 장례문화 간소화를 선언한 콤바파리(Kombapari) 마을의 원로들

 

“작은 장례식에 서명하세요!”

변화의 시작은 지역 사회의 리더 모임이었습니다. 이들은 월드비전과 함께 아이들이 건강하고 풍성하게 자라날 수 없게 하는 빈곤의 원인을 찾기 위해 고민했고, 이 장례문화가 많은 문제의 뿌리가 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후 변화를 만들기 위한 쉽지 않은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마을의 원로들과 종교지도자들의 반대가 가장 컸습니다. 그들을 계속해서 찾아가서 대화하며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변화해야 한다고 설득했습니다. 아동클럽 활동을 통해 아이들도 자신들의 권리를 이해하고 마을 회의에 참석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은 아동클럽을 통해 자신들의 권리를 알고 마을회의를 통해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아이들은 아동클럽을 통해 자신들의 권리를 알고 마을회의를 통해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건강한 마음> 이라는 그룹이 만들어져서, 장례절차에서 불필요하고 지나친 부분을 없애고 간소화 하는 논의가 시작 되었습니다. 이를 각 마을의 규정으로 정하고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행사도 계획 되었습니다.

 

“약속합니다”

라일라라(Lailara) 마을에서는 마을의 서기인 아프리아누스(Aprianus Ndamunamu, 41세) 씨가 주도적으로 장례문화간소화를 추진했습니다. 다른 마을들처럼 라일라라 마을도 우여곡절 끝에 장례문화를 간소화하고 절약한 돈을 아이들을 위해 사용하기로 결정하고 마을규정을 만들었습니다. 2014년 11월 14일 드디어 마을 장로들과 정부관계자, 모든 마을 주민들이 함께 모여 간소화 선언식을 했습니다.

장례문화간소화 선언식을 진행하는 아프리아누스 씨

장례문화간소화 선언식을 진행하는 아프리아누스 씨

장례문화간소화 서약서에 서명하는 마을의 원로들

장례문화간소화 서약서에 서명하는 마을의 원로들

 

그리고 선언식 나흘 후,
아프리아누스 씨의 어머니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라 자신에게 닥친 일이 되자 아프리아누스 씨도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집안의 어른들은 벌써 찾아와서 어머니에 대한 예를 다 하려면 제대로 된 장례식을 준비하라고 성화였습니다.

선언식에 참석한 마을 주민들과 지역정부 관계자들

선언식에 참석한 마을 주민들과 지역정부 관계자들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 밤새 한 숨도 못 자고 아무것도 먹지 못했어요.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사람들에게 잘못된 풍습을 바꿔나가야 한다고 얘기해왔지만 정말 내 일이 되니까 또 다른 고민들이 생기더라고요.”

깊은 고민 후에 아프리아누스 씨는 자신이 먼저 시작하지 않으면 변화가 시작될 수 없다는 생각에 결국 약속한대로 간소화된 장례식을 6일장으로 치렀고 손님 대접도 2번만 했습니다. 어려운 결정이었고 반대하는 친척들과의 갈등도 있었지만 만약 전통대로 치렀다면 많은 대출을 받아야만 했고 6명의 아이들을 제대로 교육시키지도 못했을 것이기에 돌아봐도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한다는 아프리아누스 씨. 무엇보다도 자신이 좋은 선례가 되어서 그 다음부터는 이웃들이 훨씬 가벼운 마음으로 간소화를 선택할 수 있어서 뿌듯하다고 합니다.

라일라라 마을의 장례문화간소화 선언에 앞장선 아프리아누스 씨

라일라라 마을의 장례문화간소화 선언에 앞장선 아프리아누스 씨

 

“이제는 작은 장례식이 대세랍니다.”

아프리아누스 씨와 같은 용기 있는 리더들 덕분에 2012년 처음 논의가 시작된 이후로 월드비전의 후원 아동들이 살고 있는 이스트숨바 지역의 18개 마을 모두가 장례문화 간소화 선언에 동참했고 지역 정부도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아이들의 삶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된 부모들은 절약한 돈으로 아이들을 더 건강하게 키우고 더 나은 교육 기회를 주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결단하고 행동하는 이스트숨바 주민들 참 든든하지 않나요?

이렇게 이스트숨바 지역의 마을들은 아동을위한자립마을에 한 걸음 더 다가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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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라라 마을, 콤바파리 마을 주민들과 월드비전 직원들

 

글. 박한영 지역개발팀
사진. 박한영, 인도네시아월드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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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된 후원아동] 흰색을 그리는 소녀

“소정아,
‘쨍 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라는 가사처럼
포기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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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정이가 실제로 받은 후원자님의 편지

생일이면 꼭 보내주시던 한 통의 손편지.
그 따스한 응원은, 소녀가 어둠 속에서도 꿈을 향해 달려갈 수 있었던 빛이었다.
후원자의 바람대로 반짝이는 어른이 된 스물셋 소정이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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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의 추억 대부분이
월드비전과 함께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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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비전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어린 소정이의 모습

“초등학교 3~4학년이었나? 너무 어릴 때라 언제부터였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요.

학교 수업이 끝나면 매일 월드비전 복지관 공부방에서 선생님과 공부하고, 친구들이랑 놀고.(웃음) 혼자 저와 오빠를 키우시느라 식당 일부터 아르바이트까지 바쁘신 어머니의 빈자리를 월드비전이 채워줬어요.”

 

“그림을 그리는 순간엔
모든 세상이 다 멈췄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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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화를 그리셨던 아버지를 닮았는지, 상상하고 떠올리는 대로 표현되는 그림이 참 좋았어요. 어머니께서 구해오신 이면지 가득 그림을 그리곤 했죠. 그렇게 시작한 미술로 우연히 나간 대회에서 큰 상도 타고, 선생님들도 ‘소정이는 그림을 계속하면 좋겠다’고 격려해주셨어요. 덕분에 지금은 대학교에서 그림, 영상 등 다양한 콘텐츠를 다루는 ‘다이나믹미디어학과’에 재학 중입니다.”

 

“나를 믿어주는 누군가 있다는 건,
말로 담을 수 없는 ‘든든함’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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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땐 소심하고 자신감 없는 아이였어요. 힘드신 어머니께 짐이 될까, 고민이나 걱정을 내색 한번 못 했죠.

사실 미술 분야가 금전적인 지원도 많이 필요하잖아요. 의지할 곳 없어 혼자 많이 울었어요.”

“그때마다 후원자님이 큰 힘이 돼주셨어요. ‘소정아, 항상 너를 응원해.’ 생일마다 보내주시던 손편지를 잊지 못해요.

월드비전을 통해 미술학원도 다니게 됐어요. 꿈을 키워나갈 기회를 선물받은 기분이었죠. 얼마나 든든했는지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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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돕는
‘사회공헌 디자인’을 하고 싶어요.”

“제가 받은 사랑과 격려를 많은 아이들에게 전하고 싶어요.

월드비전 희망날개클럽* 프로그램을 통해 유명 디자이너인 ‘배상민 교수님’을 멘토로 만났어요.

바쁜 일정 중에도 오랜 기간 저처럼 디자이너를 꿈꾸는 친구들과 함께해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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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날개클럽 프로그램은, 국내 취약계층 아동들의 가정적/경제적 복지 향상과 더불어 꿈을 지원하는 <월드비전 꿈꾸는아이들> 사업의 일환으로, 현재 200여 명의 국내 아동들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너희도 멋지게 자라서 누군가의 꿈을 응원하고 돕는 사람이 되면 좋겠어.’ 교수님의 이 말씀이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있습니다.”

 

“후원자님도
이 글을 읽으시겠죠?”

“월드비전 보고서에 일러스트 재능기부를 결심하게 된 것도, 혹시나 제 작품을 보신다면 ‘소정이가 꿈을 포기하지 않았구나’ 기뻐하시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였어요. 후원자님께 꼭 말씀드리고 싶어요. 이렇게 잘 자라서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너무 감사드린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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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색은 어떤 색을 섞어도 만들 수 없는 색이에요.
그 자체로서 존재하죠.
어릴 때부터 형편이 안 좋아 많은 걸 누리진 못했어요.
‘안쓰럽다, 어두울 것 같다’는 주변의 시선도 있었죠.
그래도 저는 ‘윤소정’ 그 자체로 당당히 살아가고 싶어요.
밝고 순수하고 하얗게.
흰색처럼!”

글. 김유진 월드비전 커뮤니케이션팀
사진. 편형철

국내아동 후원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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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할 수 있어서 더욱 감사합니다” – 소울챔버오케스트라 한지예 + 한지수 자매 단원

일요일 늦은 저녁, 양재동의 한 교회 사무실에서 흘러나오는 차이코프스키의 왈츠 선율.

19일 본 공연을 앞두고 열린 연습의 현장은 긴장감이 가득하다. 지휘자의 손 끝에 단원들의 눈동자와 호흡이 집중된다. 바이올린, 첼로, 비올라, 오보에, 플롯, 호른, 팀파니 등 17개 악기, 73명 단원들이 소울챔버오케스트라의 일곱 번째 공연을 위해 한 자리에 모였다. 선생님 세대부터 제자 세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단원들 가운데 언니와 동생이 사이좋게 참여한 한지예, 한지수 자매를 만났다.

Q1. 언니가 먼저 참여하셨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시작하시게 되었나요?

언니 한지예 씨(바이올린 연주자) : 고등학생 때부터 인연을 맺어온 박영경 선생님(현재 소울챔버오케스트라 악장)이 추천해주셨어요. 사실 제가 음대입시를 준비하고 있을 때, 집안형편 상 레슨을 충분히 받을 수 없었는데 선생님이 사례비도 받지 않고 레슨을 몇 번씩 해주셨거든요. 재능나눔으로 참여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선생님께 진 빚을 갚을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에 기쁘게 참여했죠.

한지예 씨는 2011년인 2회 공연부터 현재까지 6년째 꾸준히 바이올린 단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2회 공연에는 현악기 중심의 ‘소울 스트링스’에서 3회부터는 현악기뿐 아니라, 관악기, 타악기까지 오케스트라의 규모를 갖춰 50명 이상의 단원들이 참여했다.

수준급 연주자들이 모두 사례비 없이 순수 재능나눔으로 참여하는 오케스트라단.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맑은 물을 선물해 주고 싶다는 같은 마음이 아니었다면 결코 7회의 공연까지 이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Q2. 공연을 위해 연습시간을 빼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 같아요. 힘든 적은 없나요?

언니 한지예 씨(바이올린 연주자) : 주변의 친구들도 한 번씩 소울챔버오케스트라 이름을 들어봤다고 해요. 또, 좋은 공연이라는 평도 많아서 꾸준히 참여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큰 자부심이에요. 제가 레슨을 하고 있는 학부모에게 우리 공연에 대해 소개하며 연습 때문에 수업시간을 바꾸어야 한다고 양해를 구하면 오히려 더 응원해주시더라고요.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응원까지 받으니 너무 기뻐요.

 

Q3. 지수 씨는 언니의 권유로 참여하게 된 건가요?

언니 한지예 씨(바이올린 연주자) : 제가 권한 건 아니에요. 큰 규모의 오케스트라단도 플룻은 2~3명 정도로 소수인원인데 제 동생이라고 해서 여기에 넣어달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요. 이 자리에 참여한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스러운 일이라 동생을 추천한다는 게 더 조심스러웠고요. 혹시나 기회가 오면 좋겠다는 마음만 있었죠.

동생 한지수 씨(플룻 연주자) : 다른 단원을 통해 처음 연락을 받았을 때, 사례비가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언니가 항상 참여하던 그 오케스트라단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침 언니와 함께 있어서 물어봤더니 맞더라고요. 그래서 당장 하겠다고 했죠. 박영경 선생님이 언니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분이라는 걸 잘 아는 만큼 저 역시 선생님이 하는 일이라면 꼭 함께 참여하고 싶었어요. 이렇게 좋은 기회가 저에게도 주어져서 감사하고 기뻐요.

 

Q4. 자매가 이렇게 한 무대에 서는 것은 처음일 것 같은데요, 각오가 남다를 것 같아요. 

동생 한지수 씨(플룻 연주자) : 언니랑 이렇게 같은 무대에서 한 오케스트라단으로 연주하는 것은 처음이에요. 사실 어렸을 때부터 언니 연주하는 모습이 너무 부러웠어요. 그렇게 저도 음악을 시작하고 항상 언니를 쫓아가는 입장이었는데요. 이제 같은 무대에서 연주한다고 하니 동등한 연주자가 된 것 같아 뿌듯하기도 하고요. 언니한테 내가 이렇게 성장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어서 기뻐요. 워낙 실력 있는 단원 분들이 많으신데 누가 되지 않도록 더 열심히 할 거예요. 늘 해오던 연주이지만 아프리카 아이들을 생각하니 내가 더 잘해야겠다는 마음이 크고 비장한 각오가 드네요.

 

언니 한지예 씨(바이올린 연주자) : 이번 공연은 예전보다 좋은 홀에서 열려요. 저희가 성심 성의껏 연주해야 공연을 보신 분 중에서 한분이라도 더 아프리카 아이들을 향한 마음이 열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오늘 리허설 전까지도 계속 개인연습을 열심히 하고 왔어요.

 

Q4. 앞으로 소울챔버 공연이 진행된다면 계속 함께할 마음이 있으세요?

동생 한지수 씨(플룻 연주자) : 제 힘만으로는 아프리카 아이들을 돕는 것에 한계가 있는데 제일 잘할 수 있는 연주로 도울 수 있다는 것이 참 감사해요. 불러만 주신다면 계속해서 참여하고 싶어요.

언니 한지예 씨(바이올린 연주자) : 4회 공연은 제가 임신했을 때였어요. 입덧이 심해서 중간중간 토하기도 하면서 연습에 참여했죠. 5회 공연은 모유수유를 할 때였는데, 쉬는 시간마다 짬을 내서 유축을 하면서 참여했고요. 차로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를 오가면서 얼른 집에 가서 아이 젖 물리면서 연습했는데 어느새 그 아이가 벌써 4살이네요. 돈 때문에 하는 연주였다면 그렇게 열심히 하지 못했겠죠.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연주이기에 더 열심히 참여하고 있어요. 앞으로도 만사를 제쳐두고 나설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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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5. 마지막으로 공연을 기다리고 계신 관객분들에게 한 마디 부탁드려요.

동생 한지수 씨(플룻 연주자) : 귀한 기회인만큼 기쁘게 그리고 열심히 연습하고 있습니다. 80명의 단원 모두 같은 마음이에요. 공연 많이 보러 와주세요!

언니 한지예 씨(바이올린 연주자) : 일곱 번 째 공연이니까 더 많은 분들이 오셔서 마음을 열어주시길 기대해요. 주변의 많은 분들에게 소개해 주세요!

공연을 보러오는 관객, 소중한 후원금을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전하는 월드비전 그리고 순수 재능나눔으로 참여하고 있는 단원들까지. 다양한 악기가 모여 더욱 크고 고운 소리가 나듯 아이들을 향한 마음이 하나로 모여 더 큰 열매가 열리길 기대한다.

 

글, 사진. 커뮤니케이션팀 김수희

공연티켓 구매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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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말하지 못한 ‘그 날’의 이야기 – by 한국언니와 케냐소녀

다가오는 10월 11일.
여자아이들의 ‘인권’을 세계에 알리고
평등한 시민으로 성장하도록 목소리를 내는
#세계여아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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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냐 앙구라이를 찾은 한국 언니(a.k.a 월드비전 안대리)와  케냐 소녀의 만남.
우리의 ‘그날 이야기가 지금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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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머니에 ‘빅파이’지? 나도 줘!”

초등학교 5학년. 내 바지 주머니엔 작은 생리대가 있었고, 해맑던 남자 짝꿍은 달콤한 ‘빅파이’를 숨긴거라 굳게 믿고 있었다.

부끄럽고, 얄미웠다. 생리를 처음 시작한 열두 살. 여자라면 누구나 겪는 변화임을 알면서도 왜인지 ‘생리’는 낯설고 불편했다. 물론, 남들에게는 절대 들키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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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아프리카 케냐. 
앙구라이 마을 카싱예 학교에
나와 같은 ‘그날’을 겪는
15살 소녀 니콜레타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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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수업을 듣다 보면 금세 옷이 젖어서 집에 돌아와요. 침대 매트리스 조각을 작게 잘라 사용하거든요. 양이 많은 날은 결석할 수밖에 없어요. 솜 조각은 2-3시간만 지나면 무거워져요. 움직이다 바닥에 떨어질까 봐 불안하기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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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레타의 ‘그날’은 
내가 겪는 그날의 불편함과 
차원이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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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레타가 실제 생리대 대용으로 사용하는 매트리스 솜조각

카싱예 학교 아이들은 점심시간이면 집에 돌아간다. 학교에서 점심을 제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초대받아 간 니콜레타의 방에서 침대 매트리스 일부가 잘려나간 걸 보았다. 엄마에게 혼이 날까 봐 손바닥 크기로 잘라 학교 갈 때만 사용하고 세탁해 재사용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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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레타가장 힘든 건 뭐야?“
학교가 너무 좋은데계속 다닐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니콜레타의 꿈인 의사가 되려면 상급학교(SecondarySchool)에 가야 한다. 하지만 등록금이 비싸 여자아이들의 진학률이 현저히 낮은 편이다. 니콜레타의 언니들도 상급학교에 가는 대신 결혼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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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면서부터 엄마 그리고 언니의 삶을 지켜봤기에 미래를 어느 정도 짐작하지만 아이들에겐 저마다 꿈이 있다. 흰 가운의 의사가 되고 싶은 니콜레타, 변호사가 꿈인 카렌, 선생님, 엔지니어, 경찰. 저마다 야무진 꿈을 품는다.

“Hope for the Flower
‘꽃들에게 희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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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꿈도 비웃음으로 끝나지 않도록, 월드비전은 가난과 차별의 장벽 앞에 선 전 세계 여자아이들을 위해 <꽃들에게 희망을> 캠페인을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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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아이들이 건강하고 위생적인 ‘생리기간’을 보내도록 한국 후원자님들이 직접 바느질한 ‘면 생리대(꽃들에게 희망을 kit)’가 응원 메시지와 함께 전달된다. 지난 2016년 한해, 꽃들에게 희망을 캠페인으로 ‘11,411개’의 면 생리대가 케냐 앙구라이 소녀들에게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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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생환경 조성을 위한 학교 내 ‘화장실’ 설치와 더불어 여자아이들 스스로는 물론 선생님, 부모님, 지역 관계자와 남자아이들의 인식 변화를 위해 교육과 캠페인을 진행한다.

“여자아이’를
꿈꾸는 한 인격체로
키우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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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비전이 하려는 그 일은, 큰 인내와 오랜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그 여정에 면 생리대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 꼼꼼히 설명서를 읽어가며 바느질을 하는 후원자들이 있다. ‘혹시 내 솜씨에 아이들이 실망하지는 않을까’ 염려하는 애정 어린 마음이 변화를 만들어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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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아, 한국은 경쟁이 정말 심해서 사람들이 매우 바쁘고 각자 말 못 할 어려움도 있어. 면 생리대를 만드신 분들도 그렇겠지? 하지만 너희가 존재 자체로 소중하고,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걸 응원하는 마음을 담아 전해주시는 거야. 너희의 꿈을 나도 응원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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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와 여자로 만나 나눈
‘그날’의 이야기.

케냐 소녀들의 깊은 눈이 말하는 듯했다.
“나는 내 삶을 사랑합니다.
나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월드비전이 말하는 꽃은 소중한 존재로서의 아이들과 그 꿈을 상징합니다. 

글. 안소정 옹호팀

꽃들에게 희망을 자세히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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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월드비전 분쟁피해지역 아동보호 I AM 캠페인 – 요르단 아즈락 난민캠프

7년 째 계속되는 시리아 내전으로 아동 24,000명을 포함한 민간인 약 207,000명이 사망 했다. 시리아는 7년 만에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난민이 발생한 나라가 되었다. 490만 명 이상이 강제로 집을 떠나 주변국가로 피난 했다. 알레포, 홈스, 다마스쿠스 등 대대적 공습과 화학무기 살상으로 완전히 파괴된 고향을 떠나 시리아 내 다른 지역으로 피난한 국내 난민도 630만 명에 이른다. 무려 1000만 명이 넘는 국내외 시리아 난민 중 50%가 18세 미만 아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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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봄호 기획특집, ‘I AM’은 이유도 모른 채 모든 것을 잃어 버린 아이들의 이야기, 그리고 아이들을 습격한 비극에 맞서는 어른들의 이야기다.

“커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제 꿈은 비행기 조종사예요.” “비행기 본 적 있어?” “네. 시리아에서 많이 봤어요. 전쟁 때요. 엄청 시끄럽고 무서운 비행기요.” “그렇게 무서운데 왜 비행기 조종사가 되고 싶어?” “멀리 그리고 높이 날아가고 싶어요. 제가 운전할 비행기는 안 무서운 비행기겠죠?”

하늘이 땅과 만나는 곳. 말 그대로 텅 비고 아득히 넓은 들, ‘광야’의 수평선 끝에 마치 신기루처럼 덩그러니 하얀 난민캠프가 놓여 있다. 비행기 조종사가 되고 싶은 사라(Sara, 11)는 여덟 살 때부터 피난생활을 전전하다 2년 전 이곳 난민캠프에 왔다. 사라가 살던 시리아의 도시 ‘홈스(Homs)’가 비행기 공습과 폭격의 최전선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 때 100만 인구가 살았던 홈스는 학교, 관공서, 도로, 수도, 집 등 도시를 90%를 잃었다. 사라의 집과 학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라가 비행기를 많이 보았던 것은 그리고 고향을 떠났던 것은 선택이 아닌 강요였고 생존이었다.

우리 위로 날아가던 비행기

우리 위로 날아가던 비행기

사라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동안, 난민촌 울타리 안 네모진 하늘 위로 비행기 3대가 굉음을 내며 날아갔다. “지금도 비행기 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콩닥거려요.”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TSD)를 남길 만큼 자신을 괴롭힌 비행기지만, 꼭 비행기 조종사가 되고 싶다던 당찬 아이.

사라를 만난 다음 날, 사라의 동생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아마도 사라는 난민캠프에서 태어난 막냇동생에게 난민캠프 너머의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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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의 전쟁이 끝난 세상.

동생과 골목길에서 뛰놀고 함께 학교에 다니며, 알록달록한 색깔의 집에서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는 평범한 세상을 말이다.

 

 


 

 

나는 오른쪽 귀가 들리지 않는
기타리스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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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11일 시리아에서 요르단으로 도망쳤어요. 너무 어렸을 때라 다른 기억은 없지만 한가지는 기억 나요. 제 오른쪽 귀에서 피가 나고 있었던 거요. 아마도 공습과 폭탄 소리가 너무 커서 귀를 다친 것 같아요. 지금도 오른쪽 귀가 들리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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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만(Haman, 13)은 엄마 그리고 3명의 형제와 함께 시리아를 탈출 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빠가 사라진 뒤였다. 사람들은 아빠가 군대에 끌려간 것이라 했다. 이미 삼촌과 이웃 아저씨 몇이 소리 없이 사라진 뒤였다. 하만의 아빠는 엄마에게 말하곤 했다. ‘혹시라도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아이들과 함께 안전한 곳으로 도망치라’고. 그렇게 5년이 흘렀지만 지금도 하만은 아빠의 생사를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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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몰랐던 작은 소년은 한 동안 실어증을 앓았다. 그림치료 시간에는 검은색으로만 그림을 그렸고, 월드비전 직원에게 “나중에 군인이 되어서 전쟁에 나갈 거다. 그래서 복수할거다”는 말을 되풀이 하곤 했다.

그랬던 하만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작년 1월, 월드비전 교육 센터에서 음악수업을 듣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제가 기타를 칠 수 있는지도, 노래를 할 수 있는지도 저는 몰랐어요. 월드비전 교육센터에서 처음으로 음악을 배웠어요. 월드비전 선생님이 제 목소리가 기타 소리와 잘 어울릴 것 같다며 기타 연주에 노래를 불러보면 어떻겠냐고 하셨어요.”

복수심에 가득 차 어두웠던 하만은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며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어느새 하만의 얼굴은 부드럽게 변해갔다.

복수심에 가득 차 어두웠던 하만은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며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어느새 하만의 얼굴은 부드럽게 변해갔다.

처음 접한 음악이었지만 하만은 금세 재능을 나타냈다. 매일 기타와 노래를 연습한 덕에, 얼마 전 자신과 같은 난민들을 위한 연주회를 열기도 했다.

“우리는 비명 소리나 폭탄 소리가 익숙한 아이들이에요. 같은 소리를 기억하는 친구들과 시리아에서 부르곤 했던 노래를 연주할 때면, 그 순간만큼은 마음이 편해요.”

폭력으로 닫힌 오른쪽 귀를 의식하듯, 그렇게 하만의 왼쪽 귀는 더욱 섬세히 평화의 선율을 담아 내고 있었다.

 

 


 

 

우리는 아이들의
비극에 침묵하지 않는
어른입니다

 

7년 간 이어진 기약 없는 전쟁으로, 전쟁 없는 삶을 살아본 적 없는 아이들이 생겨나기 시작 했다. 월드비전은 이 아이들의 고통에 민감하게 반응 했다. 전쟁 같은 삶 밖에 기억할 것 없는 아이들에게 ‘전쟁이 아닌 삶’, 그리고 ‘전쟁이 끝나고 난 뒤의 삶’을 선물하고 싶었다. 눈앞에 폭탄이 떨어지고, 부모를 잃고, 사막 한 가운데로 내몰린 절망 가운데서도, 아이들이 큰 소리로 노래하고 신나게 뛰놀며, 전쟁 너머 세상을 꿈꿀 수 있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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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2017년 한 해, 월드비전은 아이들의 교육과 보호에 힘을 쏟았다. 요르단 아즈락 난민촌에 단 하나뿐인 유치원을 세웠으며, 축구장을 만들어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드라마, 음악, 미술 수업을 통해 아이의 다친 마음을 어루만졌고, 기술교육을 통해 자립심을 길러주려 노력 했다. 월드비전이라는 이름 아래 모인 수많은 어른들 덕에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다.

지금도 시리아에는 또 난민촌에는 ‘절망’, ‘비극’이라는 단어로 미처 다 담을 수 없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수십만 명의 아이들이 있다. 아이들의 삶에 찾아온 부당함에 침묵하지 않는 어른다운 어른, 청년다운 청년이 더 많아질 때 비로소 이 아이들의 전쟁 같은 삶은 끝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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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콘텐츠&커뮤니케이션팀 배고은
사진. 콘텐츠&커뮤니케이션팀 윤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