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을맞추다:에필로그] 안녕, 그늘아
안녕 그늘아, 나는 국토 대장정을 하러 온 은비야. 우리를 위해 햇빛을 가려주어서 고마워. 이 더운 날씨에 걷기 힘들어 할 때 네가 있어서 나는 정말 시원했어. 사랑해, 그늘아. 정말 고마워, 그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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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그늘아, 나는 국토 대장정을 하러 온 은비야. 우리를 위해 햇빛을 가려주어서 고마워. 이 더운 날씨에 걷기 힘들어 할 때 네가 있어서 나는 정말 시원했어. 사랑해, 그늘아. 정말 고마워, 그늘아.
2017년 8월 25일,
미얀마 소요 사태 발생.
로힝야족을 비롯한 미얀마 소수 민족에게 자행된 무자비한 탄압. 집과 마을은 불길에 휩싸였고 가족들은 차가운 총구 앞에 사라졌습니다. ‘인종 청소’라 불릴 만큼 끔찍했던 유혈 사태. 인접한 국경의 방글라데시로 살기 위해 떠난 10여 일의 피난길. 해안가를 따라 형성된 방글라데시 콕스 바자르 지역 난민촌에는 약 90만 명의 미얀마 난민이 나라와 가족을 잃은 채 살아갑니다.
그렇게 벌써, 1년이 흘렀습니다.
훅- 하고 몰려오는 뜨겁고 습한 공기. 유일한 생명줄인 구호물자와 식량을 받기 위한 난민들의 아우성이 귓가를 울립니다. 몬순 기후(6~8월)의 영향으로 내린 폭우 탓에 발이 푹푹 빠지는 진흙 언덕을 따라 20만 개의 임시 텐트가 1m의 간격조차 없이 빼곡한 난민촌을 찾았습니다.
콕스 바자르 미얀마 난민촌의 모습 (사진 월드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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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빛 가득한
피난길에 오른 아이들
몸을 한껏 웅크리고 조심스레 들어간 어둡 고 비좁은 난민 텐트. 차가운 흙바닥 위, 방 수천과 대나무를 엮어 만든 텐트에는 야콥 (11세)이 살고 있습니다. 그림 그리기가 가장 좋다는 소년이 보여준 한 장의 그림. 빨간색, 파란색 알록달록한 그림에 충격적인 아이의 설명이 이어집니다.
“여기는 제가 살았던 마을인데요. 우리 집과 차가 불타고 있는 걸 봤어요. 피 묻은 손도 봤어요. 그래서 다 빨간색이에요.” 아이의 그림 속엔 끔찍했던 그날 밤이 선명합니다. “낯선 사람들이 마구 총을 쐈어요. 피가 흐 르는 도로를 따라 도망쳤어요. 언제쯤 집에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야콥은 운이 좋게도 부모님과 함께 도망쳤지 만, 많은 아이가 눈앞에서 부모님과 형제, 자매의 죽음을 목격했습니다. 살기 위해 국경 을 건너 도착한 낯선 난민촌. 하지만 이곳에서의 삶도 가혹합니다.
그림을 들고 서 있는 야콥 (사진 월드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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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난민들
콕스 바자르 해안가를 따라 총 27개의 캠프로 이뤄진 미얀마 난민촌. 서울 여의도 면적의 약 3배에 달하는 불모지에 피난민 90만 명이 모여 살고 있습니다. 이곳엔 전기, 식수, 식량, 집, 학교 등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임시로 지어놓은 공 용 화장실과 샤워실에서 불안에 떨며 몸을 씻고 용변을 해결합니다.
“아빠가 죽는 꿈을 꿨어요. 곧 오시겠죠?”아빠의 죽음을 모르는 모모(4세)의 물음에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폭우에 텐트가 무너지면 어쩌죠? 아이를 씻길 수도 제대로 먹일 수도 없어서, 전염병이나 영양실조에 걸리면 어쩌나 걱정돼요.” 엄마 샤히라는 딸의 머리를 쓸어 넘깁니다.
이들이 가장 두려운 건 해가 지고 매일 찾아오는 ‘밤.’ “난민촌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요. 집 안도 길가도 온통 캄캄해요. 공용 화장실을 가야하는데, 밤엔 너무 무서워요.”(자밀라, 20세) 가로등 하나 없는 난민촌의 밤. 아이들은 어
둠 속에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난민 텐트 안에서 환히 웃는 모모 (사진 한겨레 백소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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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난민과
동행하는 월드비전
“머리 어깨 무릎 발 무릎 발~”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이곳. 월드비전은 콕스 바자르 난민촌 내 9개의 아동친화공간(CFS)을 운영해요. 아이들의 심리 안정을 돕는 레크리에이션과 미술 치료, 언어 교실 등을 주 5일 2시간씩 진행하죠. 3~12세 난민 아동 2,000여 명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날은 특별한 팔찌 배분이 있었는데요. 팔찌엔 아동을 담당하는 월드비전 표시와 함께 등록번호가 새겨집니다. 표지판도 없이 밀집된 난민촌에서 아이를 잃어버렸을 때 찾을 수 있는 식별표인 셈이죠.
아동친화공간(CFS)에서 노래하는 아이들 (사진 한겨레 백소아 기자)
“밖에 나가면 엄청 정신이 없어요. 사람들도 많아서 길을 잃을까 봐 무서웠어요. 이렇게 예쁜 팔찌가 생겨서 좋아요!” (로지나, 7세 ) 팔찌가 신기한 듯 서로의 손을 보며 까르르 웃는 아이들. 그 환한 모습에 괜스레 눈물이 났습니다. 사랑 안에서 안전하게 뛰어놀 나이의 어린 천사들. 끝이 보이지 않는 현실 앞에 우린 무얼 해줄 수 있을까요? 일주일 남짓했던 난민촌에서의 시간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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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약 60명.
이곳 난민촌에서도
새 생명이 태어납니다.
빛이 보이지 않는 현실에도
생명은 꿈틀대고
아이들은 자라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희망을 갖는 이유입니다.
“미얀마 난민을 기억해주세요.”
아동식별팔찌를 차고 웃는 아이들 (사진 한겨레 백소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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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비전 미얀마 난민 긴급구호 지원 계획
• 규모 : 약 1억 1천만 원
• 기간 : 2017년 9월~ 2018년 12월
태양열 가로등 26개 설치 |
랜턴 1,400개 전달 |
위생용품 (비누, 칫솔, 세제 등), 여성용품 (생리대, 속옷 등), 산후용품 (담요, 소독제 등) |
•이번 특집 기사는 한겨레신문과 함께하는 <2018 나눔꽃 캠페인>의 일환입니다.
•기사 속에 언급된 난민은 보호를 위해 가명을 사용했습니다.
글. 김유진 콘텐츠& 커뮤니케이션팀
사진. 한겨레신문 백소아 기자 / 월드비전
세계 여자아이의 날, Basic for Girls가 여자아이들을 응원합니다.
매년 10월 11일은 세계 여자아이의 날입니다. 전 세계 여자아이들이 여자이면서 동시에 아동이기 때문에 겪고 있는 차별과 폭력의 현실을 알리고 그들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국제 사회의 의지를 모으기 위해 UN에서 지정한 세계기념일입니다. 월드비전은 전 세계 여자아이들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를 지키고자 ‘Basic for Girls’를 시작합니다.
왜 여자아이인가요
케냐, 탄자니아 등에 사는 10대 여자아이들에게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 세 가지가 없습니다. 그 세 가지는 자신의 의지대로 결혼할 권리, 깨끗한 생리대를 사용할 권리, 안전한 환경에서 교육받을 권리입니다. 여자라는 이유로 초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결혼을 고민해야 하고, 생리 기간만 되면 학교를 빠져야 하고, 등하굣길에 혹은 학교에서 폭력을 당하지는 않을까 두려움에 떨어야 합니다. 이러한 상황은 여자아이들이 필요한 교육을 받는 데 있어 커다란 장애물이 됩니다. 전 세계적으로 약 1억 3천만 명의 여자아이가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있으며 그중 4분의 3이 여성 청소년입니다. 동일한 환경이라고 가정할 때 여자아이가 남자아이에 비해 학교를 중도에 그만둘 가능성이 4배 이상 높습니다. 우리에게는 너무 기본적이라서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들. 케냐와 탄자니아의 친구들에게도 기본적인 일상을 선물해주세요.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나요
월드비전은 여자아이들이 안전한 환경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폭력이 발생했을 때 신고할 수 있는 체계가 마련된 여아 기숙사(Rescue center)와 남녀용이 구분된 화장실 등을 건축하는 사업을 진행합니다. 이뿐만 아니라 아동 및 지역 주민들이 여자아이들의 권리를 존중할 수 있도록 인식 개선 교육을 실시하며 조혼 근절을 위한 캠페인을 진행합니다. 또 생리대를 구하기 어려운 아이들에게 생리대를 전달하며 동시에 올바른 성의식을 알리기 위한 교육과 위생 교육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월드비전 활동에 동참해주세요.
1. 정기 후원하기
여러분의 후원금은 여아에게 안전한 학습 환 경 조성, 여아 권리 인식 증진, 성·위생 교육, 조혼 근절 등을 위한 활동에 사용됩니다. 2 DIY 면생리대 만들어 보내기
* 키트 1개당 2시간의 자원봉사 시간을 발급합니다. 1인당 최대 8시간까지 가능합니다. |
글. 양승혜 옹호&시민참여팀
사진. 월드비전
2011년, 유채꽃밭 속에서 예쁜 미소를 짓던 제주 소녀.
월드비전 플루트 교실에서 친구들과 연주하는 게 제일 즐겁다며, “이제 막 배드민턴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수줍게 웃던 열한 살 은서. 8년 후 다시 만난 열아홉 살 은서는 가슴에 태극마크를 새기고 우리를 환히 반겨주었다.
선생님, 그거 아세요? 저는 아직 최고는 못 해봤어요. 전국 대회나 세계 대회에서도 2등, 3등만 해봤어요. 그런데 있잖아요. 그래서 좋은 건 아직 올라갈 곳이 있다는 거예요! 제겐 더 위로 올라갈 가능성이 남아 있는 거잖아요.(웃음)
이제는 1등만 남았어요! |
전 세계 코트를 누비는 배드민턴 유망주
“‘마이(My)!’ 저의 주 종목은 배드민턴 복식인데요. 가운데로 셔틀콕이 날아오면 파트너랑 부딪치게 돼요. 그때 외치는 거예요. ‘마이!’ 이번 공은 내가 칠게 하는 신호로. 둘이 하는 거니까 호흡 맞추는 게 제일 중요해요. 서로 긴장도 풀어주고 응원도 해주죠. 혼자만 잘해선 안 되잖아요.”
“혹시나 자만해질까 봐 코치님이 칭찬을 잘 안 해주시는데, 몇 달 전 단체 경기가 끝나곤 ‘정말 잘했다.’고 해주셨어요. 저희 팀이 전국 2등을 하는데 제가 활약을 좀 했거든요.(웃음) 코치님은 감격해서 우셨어요.” “은서가 팀의 에이스인 거네~.” 말하자 소녀는 민망한 듯 웃는다. “팀의 맏이기도 하고 큰 기대를 받다 보니까 때론 부담스럽기도 해요. 그래도 제가 잘해야 우리 팀도 잘되는 거니까, 시합이 시작되면 스스로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계속 말해요.”
2018 독일 주니어오픈 여자 복식 2위, 네덜란드 주니어오픈 대회 3위 등 뛰어난 실력으로 국내외 코트를 누비며 베드민턴 유망주로 떠오른 은서. 8년의 세월 동안 훌쩍 자란 키만큼 마음도 한 뼘 자라 있었다.
“잘한다, 우리 은서!” 아이를 자라게 한 응원
“어릴 때부터 축구, 육상 등 안 해본 운동이 없어요. 왠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운동이 좋아요. 땀 흘려 뛰고 노력한 만큼 실력이 좋아지는 게 느껴지거든요. 배드민턴도 처음 시작했을 땐 되게 못했어요. 코치님 따라서 훈련받고 노력하니까 점점 잘하게 되더라고요.”
“할머니는 항상 그러세요. ‘수고했어. 잘한다, 우리 은서.’ 상을 못 받아도 3등을 해도요. 월드비전 선생님과 후원자님도 계속 응원해주세요. 열두 살 때 처음 후원자님이 생겼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생일날이면 꼭 편지와 선물을 보내주셨어요. 운동하는 걸 아시니까 ‘다치면 안 된다. 감기 걸리지 마라.’ 항상 걱정해주세요.”
엄마의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도록 이어진 가족들과 월드비전 그리고 후원자의 사랑은 은서를 자라게 했다.
“후원자님은 어떤 분이실 거 같아?” 묻자 아이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키가 크고 듬직하실 것 같아요. 뵌 적은 없지만 그런 느낌이에요. 든든해서 그런가 봐요. 사실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저를 몇 년간 꾸준히 관심 갖고 지켜봐주시는 게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운동 열심히 해서 거둔 성과로 나중에 뉴스나 TV에 나오고 싶어요. 잘 성장한 모습을 보여드리는 게 보답하는 길인 것 같아요.”
다가올 내일이 기대되는 제주 소녀
월드비전 동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냐고 묻자 은서는 말한다. “너무 크게 생각하지 마. 좌절하거나 슬퍼하지 말고, 네가 좋아하고 잘하는 걸 찾아봐!” 열아홉 여고생의 대답이라기엔 너무 의젓해서 ‘꼭 어른 같다’고 웃자 은서도 따라 웃는다. “선생님, 근데 진짜 그래요. 바꿀 수 없는 현실 때문에 슬퍼하고 있으면 지금 할 수 있는 걸 놓치잖아요.” 당찬 은서의 말에 메달을 목에 건 은서를 볼 수 있을 거란 기대가 들었다.
9월 세계 주니어 대회를 앞둔 은서. 전지 합숙 훈련 기간엔 새벽 6시부터 밤 9시까지 밥 먹는 시간을 빼곤 손에서 배드민턴 채를 놓지 않는다. 매일 8시간 가까이 이어지는 훈련. 반짝이는 땀방울을 따라 제주 소녀는 전 세계를 향해 꿈을 펼치고 있다.
2004년, 심무희 봉사자님이 월드비전에서 번역 봉사를 시작한 해입니다. 당시 67세이던 심무희 님은 번역 봉사자 선발 과정을 거쳐 당당히 합격하셨지요. 그 후 14년, 봉사자의 나이 첫 자리는 두 번 바뀌었고 봉사자님은 1만 2,073통의 편지를 번역했습니다.
2018년 5월, 심무희 봉사자님으로부터 “14년간 쉬지 않았던 봉사에 이제 마침표를 찍어야 할 때인 것 같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아쉬움이 잔뜩 묻어나는 봉사자님의 목소리. 긴 세월 애써주신 심무희 님께 감사 인사를 전하기 위해 우리는 직접 찾아뵈었습니다. 봉사자님이 들려주신, 한바탕 소나기가 지나간 뒤 눈부시게 빛나는 햇살 같은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매일이 눈물바람이던 그때, 월드비전을 만났어요.”
중풍을 앓던 시어머니를 모시느라 정신없이 살았어요. 남편도 암 환자였고. 하루 스물네 시간을 온전히 내 가족을 돌보는 것만으로 난 너무 힘에 부쳤어요. 그러다가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애들도 다 출가시키고, 남편마저 천국에 간 거야. 주체할 수 없이 많아진 혼자만의 시간이 너무 무서웠어요. 큰 집을 팔고 허둥지둥 아파트로 이사 왔는데 두려움은 여전했어요. 밥 먹을 때마다 그냥 눈물이 흐르더라고. 그렇게 3년을 울며 지냈어요. 생전에는 속도 많이 썩인 남편인데 왜 그랬는지 몰라. 모래 사막에 덩그러니 떨어진 거 같고, 팔다리가 다 떨어져 나간 것 같고. 이 눈물이 언제 멈출지 알 수가 없었어요. 보다 못한 동생이 자기가 이런 거(NGO 서신 번역)를 하고 있는데 언니도 시간을 메울 겸 해보라고 권한 것이 14년 동안 월드비전과 함께한 시작이 되었네요.
“나의 아픔과 외로움이 어느새 사라지고 행복이 자리 잡더라고요.”
월드비전에 전화를 해서 번역 봉사를 신청했더니 테스트처럼 번역할 편지를 보내주시더라고. 그래서 그걸 열심히 번역해서 다시 월드비전으로 보냈지. 월드비전이 정한 수준에 합당했는지 함께하자고 하셔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쉰 적 없이 아동이 후원자에게, 후원자가 아동에게 보내는 편지를 번역해왔어요. 꼬박 14년 동안.
처음에는 집중할 무언가가 생기니까 정말 열심히 했어요. 또 내가 뭐든 한번 하면 단단히 하는 사람이거든. 한 번도 날짜 어긴 적 없이 하여튼 열심히 했어요. 그런데 말이에요. 이게 어느새 내 아픔을 밀어내고 있더라고. ‘내가 빨리빨리 해서 보내면 아이들이, 후원자들이 편지를 받고 얼마나 좋아할까?’ 하는 마음이 쌓이면서 지독하게 나를 괴롭히던 외로움도 자연스레 사라졌어요. 번역 봉사가 나를 살렸죠. 후원 아동들이, 후원자가 보낸 편지들이 나를 살린 거예요.
“긍지를 갖고 했던 번역 봉사. 문득문득 그 시간들이 떠오를 거예요.”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으며 늘 건강이 걱정이었는데 얼마 전 밤에 혼자 화장실을 다녀오다 쓰러졌어요.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이제 내 나이와 체력으로는 더 이상 이 귀한 일을 감당할 수 없겠구나.’ 생각이 들었어요. 14년 만에 처음으로 든 마음이에요. 67세에 시작한 번역 봉사였고 이제 제 나이 81세예요. 세월이 왜 이렇게 빨라요? 친구들은 이 나이에 무슨 사서 고생이냐고 핀잔도 많이 줬지만 저는 제 자신이 자랑스러웠어요. ‘성실하고 꼼꼼하게 지금까지 봉사를 해온 건 쉬운 일은 아니다.’ 하며 스스로를 대견스러워해요. 그리고 무엇보다 후원 아동과 후원자들이 주고받는 사랑을 중간에서 소중하게 전달해온 시간과 노력이 ‘행복’이었어요. 번역 봉사는 마무리하게 되었지만이 행복했던 순간들이 문득문득 떠오를 것 같아요.
“애틋한 마음들을 우린 소중히 다루고 전할 책임이 있어요.”
후원자의 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들은 반드시 건강한 어른이 될 거라고 굳게 믿어요. 서신을 번역하다 보면 얼굴도 한 번 마주한 적 없는 사람들이 이렇게 애틋할 수 있는지 신기하기까지 해요. 정말 소중한 마음들이죠. 그러니 우리 번역 봉사자들이 그 마음을 귀하게 여기며 작업을 해야 해요. 다들 잘하고 계시겠지만 이제 일선을 물러나는 선배로서 부탁하고 싶은 건 ‘내가 이 재능으로 후원을 하는 거다.’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쉼표, 마침표, 첫 문장 대문자 사용 등 기본부터 꼼꼼히 잘 지키는 것도 정말 중요해요. 그런 기본적인 자세부터가 아이를 생각하며 편지를 보낸 후원자의 마음을, 후원자를 그리며 꾹꾹 글씨를 써 내려간 아이들의 마음을 담아내는 거니까요.
번역기간 14년 번역편지 12,073통 좀 더 건강해서… 더 했으면 좋았을걸. 자꾸 넘어지고 정신을 잃고 하니 주위에서도 너무 말리고 저도 제때제때 번역할 자신이 없어 여기에서 마무리하려고 해요. 월드비전에서는 그간 제가 번역한 편지가 1만 통이 넘는다며 대단하다고 하시지만 전 그냥 성실히 제 몫을 했을 뿐이에요. 그것보다 제가 번역할 수 있도록 편지를 주고받는 아동과 후원자님께 감사 드려요. 그 편지들이 제 눈물을 닦아주고 위로해주었어요. 자꾸만 저에게 감사하다 하지 마세요. 제가 감사해요. 정말로 제가 감사하고, 감사해요. |
글. 윤지영 후원동행2팀
사진. 편형철
엄마와 동생과 떨어져 몸이 아픈 할머니와 살아야만 했던 세호. 먼 도시에서 일하는 엄마와 보육원에 맡겨진 동생을 생각할 때 느껴지는 감정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가슴에다가 독침을 1초에 9번 찌르는 느낌이에요.”
세호의 안타까운 사연에 따뜻한 손길들이 모여 보육원에 갔던 동생과 함께 살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약 반년이 지나 폭염이 계속되던 8월의 어느 날, 세호네를 다시 찾아갔습니다.
동생이랑 같이 사는 게 좋아요
2명이 반겨주던 지난 방문 때와는 달리 이번엔 3명이 반겨주었습니다. 새로운 한 명은 보육원에 있던 세호(가명)의 동생 여덟 살 세희(가명).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두 아이를 양육할 수 없었던 할머니는 어린 세희를 보육원에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많은 분이 보내준 도움의 손길 덕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세희는 특유의 짓궂은 모습으로 환영해주었습니다.
“옛날에는 한 달에 한 번 보육원에 가야만 서로 얼굴을 볼 수 있었어요. 둘이 헤어질 때면 어찌나 우는지…. 그런데 이제는 같이 사니까 좋은가 봐요. 집에서는 둘이 매일 투닥투닥해도 밖에 나가면 세호가 세희를 끔찍이 챙긴다니까요.”
엄마를 한 번 보는 데 드는 비용이 부담스러워 보러 가지 못하다가 얼마 전에 방학을 맞이해서 엄마를 보고 왔다는 세호. 아직 엄마랑 같이 살지는 못하지만 이렇게 엄마를 볼 수 있는 것도 많은 분이 도움을 주신 덕분이라며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쉬지 않고 장난을 치는 개구쟁이 남매
이사 갈 날만 기다리고 있는데 날짜가 왜 이렇게 안 가요
9월 초, 세호의 가족은 겨울마다 살이 아리도록 춥던 집을 떠나 새로운 보금자리로 옮길 예정입니다. 이사 갈 집에 대해 물어보자 세호와 세희는 벌써 학교 친구들에게 자랑했다며 환하게 웃었습니다. 할머니도 시간이 너무 안 간다며 새집에 대한 기대가 가득했습니다.
“새로운 곳으로 떠나서 가장 좋은 건 세호에게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준다는 거예요. 세호가 공부도 잘하고 공부를 하고자 하는 의지도 있는데 그것을 지원해주지 못해서 늘 미안했거든요. 근데 이제 월드비전을 통해 많은 분들이 도와주셔서 세호를 위해 공부방도 만들어주고, 컴퓨터도 사줄 수 있어요. 세호가 공부만큼은 마음 놓고 원 없이 했으면 좋겠네요. 또 좋은 점은 세호 또래의 친구들이 많이 생긴다는 거예요. 지금 이 동네에는 나이든 분들밖에 없거든요. 앞으로는 세호와 세희가 또래 친구들과 동네에서 뛰어놀 수도 있다는 사실이 기뻐요. 빨리 이사 날짜가 왔으면 좋겠는데 왜 이렇게 시간이 안 간대요.”
제 꿈은 판사예요
꿈이 판사인 세호는 학교에서도 공부를 잘하기로 소문이 나 있습니다. 저번에 나간 주산 대회에서 받은 상금을 모두 할머니께 드릴 거라며 자랑도 합니다.
이에 질세라 세희도 꿈이 다섯 개나 있다며 자랑합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재미있어요. 아동센터에도 제가 가고 싶다고 이야기했어요. 공부를 할수록 알아야 할 게 많아지거든요. 모르는 게 있으면 알 때까지 선생님께 물어봐요.”
오빠와 할머니와 함께 살게 돼 매일이 행복하다는 세희
감사합니다. 도와주셔서
“옛날에는 안 주고 안 받는 게 서로에게 좋은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막상 제가 도움을 받고 보니 적은 돈이라도 너무 감사하더라고요. 제가 그동안 세상을 너무 이기적으로 살았다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이제는 아이들에게 베풀면서 살라고 가르칩니다. 얼굴도 모르는 분들이 저희를 도와주신다는 게 너무 놀랍고 감사했습니다. 고마운 마음을 말로 전할 수밖에 없지만, 저도 작은 거라도 베풀면서 살겠습니다. 정말 애들 반듯하게 잘 키우겠습니다. 고맙고 감사합니다.”
감사한 마음을 말로 전할 수밖에 없다며 연신 고맙다는 말을 되풀이하시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후원자님들에 대한 감사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도움을 주신 분들께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고 묻자
세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감사합니다. 도와주셔서.”
글. 김혜령 콘텐츠&커뮤니케이션팀
사진. 김유진 콘텐츠&커뮤니케이션팀
고난과 가시밭길의 한국 컬링 역사 속에서 사람들의
지원과 응원으로 올림픽 은메달의 기적을 이루어냈듯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기적, 이제 우리가 만들 차례입니다.
타임 포 미라클 캠페인은 전세계 취약 계층 아이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기적을 만들어 내기 위해 월드비전과 경북컬링팀이 함께 진행하는 해외 아동 후원 캠페인입니다.
후원 아동의 삶이 지속적인 후원으로 변화되는 모습이 마치 저희 컬링팀이 주변의 관심과 도움으로 은메달이란 값진 성과를 만들어낸 모습과 같다는 생각에 월드비전에 남다른 애정을 더 갖는 것 같습니다.
김민정 감독 |
2010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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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받았던 도움들을 누군가에게 또 베풀어야 한다.”
김경두 교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우리는 2010년 알리오사를 만났습니다. |
축구를 좋아하고, 수학을 잘한다고 당시 7세였던 알리오사가 처음 저희에게 보내온 편지를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
2015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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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 기업과 주변의 지원과 도움으로 컬링팀의 실력도 일취월장하여 세계적으로 점점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 알리오사는 매년 저희에게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학교를 다니는 게 즐겁다는 알리오사의 편지는 컬링팀에도 큰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
2017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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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링팀이 받았던 도움을 나누기 위해 월드비전 로고를 유니폼에 새겨 로고 나눔을 시작하였습니다. | 상급 학교에 진학하며 후원이 종료된 알리오사의 메시지.
“후원자님, 저를 7년간 후원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덕분에 저는 좋은 학교에 진학할 수 있게 되었어요.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도록 응원 하겠습니 다.” |
2018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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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오사의 응원 덕분인지 20년 전 컬링 경기장도 없었던 대한민국은 당당히 올림픽 은메달을 목에 걸며 컬링 강국으로 우뚝 성장하였습니다. | 컬링팀은 새로운 후원 아동을 만났습니다. 반가워! 반 응엔 호(5세, 베트남) |
컬링팀의 후원을 통해 반 응엔의 삶에도 알리오사처럼 기적 같은 변화들이 일어나겠죠? |
![]() 식수위생사업 “아이들이 깨끗한 식수를 마실 수 있도록 제공합니다.” 팀이 가장 갈증을 느끼는 결정적인 순간에 투입되는 백업의 역할처럼 마을에 깨끗한 물 공급 시설을 설치하고, 주민들의 지속 가능한 관리와 위생 여건 개선을 돕습니다. |
![]() 교육사업 “아이들이 삶을 계획하도록 리드합니다.” 팀의 전술을 세우는 주장의 역할처럼 다양한 교육을 통해 아이들에게 필요한 기본적인 능력을 키워주고, 삶의 계획을 세우는 역량을 길러줍니다. |
![]() 아동보호사업 “아이들이 안전한 환경 속에서 자라날 수 있도록 보호합니다.” 스위핑을 통해 스톤의 진로와 속도를 조절하는 스위퍼의 역할처럼 아이들이 바르게 자라도록 주변 환경과 인식의 개선을 이끌고 보호합니다. |
![]() 보건영양사업 “아이들이 균형 잡힌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관리합니다.” 팀워크를 증진시키는 팀의 중심 역할처럼 영양 공급과 관리로 아이와 가족의 기초 보건을 돕고, 검진 및 의료 시스템으로 마을 주민의 건강을 증진시킵니다. |
![]() 소득증대사업 “아이들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도록 지원합니다.” 정확한 투구와 경기에서 승리하기 위해 수천 번의 훈련을 지휘하는 감독의 역할처럼 농업 훈련으로 생산성을 높이고, 경제적으로 자립할 능력을 키웁니다. |
글. 김보영 콘텐츠&커뮤니케이션팀
사진. 이용대
추우면 추운 대로 더우면 더운 대로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토요일 오전이면 어김없이 모이는 아이들이 있다. 전국 세 지역에서 운영 중인 월드비전 국내아동 축구클럽 멤버들 팀마다 색깔은 조금씩 다르지만 ‘축구’를 향한 열정만큼은 어느 팀도 우열을 가를 수 없다. 감독님에게 몇 번씩 지적을 당해도 꿋꿋하다.
따사로운 봄 햇살이 잔디 운동장을 가득 채운 토요일 오전.
월드비전 동해복지관 축구클럽 아이들과 삼척 지역 아이들의 경기가 펼쳐졌다. 50분간 숨차게 이어진 승부가 4대2로 끝나고, 땀과 열정을 운동장에 쏟아낸 아이들을 향해 동해복지관 축구클럽 선장인 노병열 감독이 외친다.
서울에서 4시간 남짓.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어느새 푸른 바다가 눈앞에 펼쳐진다. 인구 약 10만의 작은 도시 ‘동해시’. 바다 내음과 평화로운 햇살이 가득한 이곳에 10주년을 맞이한 월드비전 동해복지관 축구클럽이 있다.
전국 최강을 꿈꾸며 올해로 10년째 달리는 월드비전 국내아동 축구클럽 팀명 월드비전 동해FC |
시합 전 몸풀기를 하는 아이들.
꿈꾸는 아이들을 위해 시작된 월드비전 국내아동 축구클럽
마음을 노래하는 합창단, 인권을 배우는 아동권리위원회, 영양교육을 위한 쿡앤쑥쑥, 진로 탐색을 돕는 꿈디자이너. 모든 아이가 건강하고 밝게 자라며 꿈꿀 수 있도록 월드비전은 다양한 아동복지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그중 동해복지관의 큰 자랑인 축구클럽. 2008년 시작된 축구클럽은 현재 전국 3개 지역에서 운영되고 있다. 이곳에서 아이들은 축구를 하며 자신감과 협동심, 체력을 기른다.
“올해로 벌써 10년 됐네요. 첫 경기에서 우리 아이들이 5대0으로 이겼죠. 시작부터 좋았어요.(웃음) 초창기 멤버인 주현이, 부일이를 포함해 모든 아이들이 다 기억에 남아요. 10년간 아이들이 크게 다치지 않고 함께했다는 사실이 뿌듯합니다. 담당 직원은 매주 토요일마다 축구클럽 훈련에 함께 했어요. 주말까지 출근하는 상황이 때로는 지칠 수도 있죠. 그래도 아이들이 신나게 공을 차며 뛰는 모습을 보면 피곤한 마음이 저절로 사라져요. 아이들의 웃음이 주는 힘이죠.” 첫 담당자였던 월드비전 서순영 팀장은 말한다.
‘예쁜 선생님’이라 불리는 축구클럽 담당 복지사 임윤정 간사도 고개를 끄덕인다. “아이들의 열정이 엄청나요. 비 오는 날에는 쉴 법도 한데 실내에서 이론 수업이라도 듣겠다고 졸라요. 매주 토요일 아침, 늦잠 자는 대신 일찍 일어나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오는 아이들을 보면 저희도 가만히 있을 수 없더라고요. 이전에 축구클럽을 담당했던 직원들도 같은 마음이었겠죠? ‘일’로만 생각했다면 축구클럽이 이렇게 오랜 시간 이어질 수 없었을 거예요.”
올해 10주년을 맞은 월드비전 동해복지관 축구클럽. 지금까지 약 400명의 아이들이 축구클럽을 거쳐갔다. 매주 토요일에 오전 훈련을 하고, 여름에는 합숙 훈련, 때때로 친선경기 등을 치른다. 초기에는 월드비전 후원아동으로만 구성됐으나 현재는 지역 내 일반아동들도 함께한다. 전체 멤버 중 70%인 월드비전 후원아동들은 자발적 신청과 보호자 동의 아래 참여하며, 축구화, 유니폼, 활동비까지 전액을 지원받는다. 약 30%의 일반아동들은 일정 회비를 내고 참여한다. 후원아동과 일반아동이 구별되기보다는 같이 어울리며 서로를 배우고 부족한 부분을 메우며 성장하도록 돕기 위함이다. 매주 친구, 형, 누나, 동생들과 달리며 아이들은 관계를 형성하고 자연스레 협동심과 배려를 배워가고 있다.
왼쪽부터ㆍ한규성 코치, 임윤정 간사, 노병열 감독, 서순영 팀장
“축구 실력도 중요하지만 질서, 태도, 언행 같은 인성교육에 많이 신경 쓰고 있어요. 감독님, 코치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지도하시는 부분이기도 하죠. 많은 월드비전 아동들이 상처와 결핍으로 소극적이고 자신감 없는 모습을 보이기도 해요. 축구클럽 담당 직원이자 사회복지사로서 마음의 빈자리까지 채워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월드비전 동해복지관 축구클럽 담당 임윤정 사회복지사 “합숙 훈련을 가면 감독님, 코치님도 꼭 아이들이랑 같은 방을 쓰세요. 자기전에 아이들 이불도 덮어주시고, 다친 곳은 없나 살피시고. 훈련할 때는 엄격하시지만 운동장 밖에서는 친할아버지처럼 아이들을 챙기세요. 감독님과 코치님, 저희 월드비전 직원들은 그저 한결같이 기다려주고 관심을 주었을 뿐인데, 변화의 계기가 되고 아이들이 점차 달라져요. 처음에는 감독님이 집 앞에 도착해서 전화해야 겨우 나오던 아이도, 요즘은 먼저 나와서 |
높이 차오르는 축구공과 함께 오늘도 한 뼘 성장하는 아이들
“감독님, 저 들여보내 주세요! 제발요~ 잘할 수 있어요.” 전반전, 팀이 2대0으로 지고 있는 상황. 한쪽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친구는 골키퍼를 맡은 열네 살 유진이. “초등학교 5학년 때 월드비전 후원아동으로 등록되면서 축구클럽도 시작하게 됐어요. 처음 골키퍼를 할 때는 공에 맞으면 너무 아팠는데, 이제는 적응돼서 세게 날아오는 공도 잘 막을 수 있어요. 다리에 상처가 많이 났지만 아프지 않아요. ‘영광의 상처’잖아요.” 사소한 다리의 상처쯤은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학교는 좀 귀찮을 때도 있는데요. 축구클럽 오는 건 절대 귀찮지 않아요. 축구는 저한테 ‘인생’이에요. 여기 다니기 전에는 동네에서 공놀이밖에 못 했는데, 이제는 친구들이랑 매주 훈련받고 시합도 해서 좋아요. 잘하면 감독님이 ‘유진이, 굿! 굿!’ 하고 칭찬해주시거든요. 그때는 진짜 기분 좋아요. 감독님, 코치님께 정말 감사해요.”
(좌) 유진이 (우) 병곤이
한편 운동장 한쪽에서 후반전 경기를 위해 몸을 풀고 있는 아이는 뽀글뽀글 파마머리가 트레이드마크인 열한 살 병곤이다. “저도 빨리 경기 나가서 뛰고 싶어요! 처음에는 감독님이 혼내는 것 같아 무섭고, 축구도 어려워서 나오기 싫었어요. 축구클럽에 나온 지 1년 정도 됐는데 이제는 하~나도 안 무서워요. 감독님이랑 친해졌고, 제가 미워서 그러시는 게 아니라 저한테 잘 가르쳐주시려고 그런 거잖아요.” 어느샌가 어른스레 감독님을 이해하기 시작한 병곤이. 축구클럽에 다니며 배운 성숙함이다. “예전에는 토요일에 늦잠 자고 TV 보고 그랬는데, 이제는 친구, 형들이랑 축구해서 좋아요. 아홉 살 동생 민아도 얼른 자라서 같이 다니면 좋겠어요.”
가족의 행복으로 이어지는 아이들의 변화
“아들 문호가 축구하는 모습을 보러 왔어요. 누나가 장애를 앓고 있어서 그동안 문호에게 신경을 많이 못 썼거든요. 축구클럽에 보내면 감독님, 코치님, 월드비전 선생님들이 잘 챙겨주시니까 너무 감사하죠. 감독님을 뵐 때마다 돌아가신 친정아버지가 많이 생각나요. 친손주처럼 아이들을 챙겨주시는 모습에 항상 마음이 울컥하죠.” 응원석에 앉은 부모님들 속에서 열여섯 살 문호의 어머니를 만났다.
“문호가 건강하게 스트레스도 풀고 마음의 힘을 얻을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중에 월드비전 선생님께 축구클럽을 추천받았어요. 축구클럽에 다니면서 아이에게 책임감과 성실함이 자라난 것 같아요. 매주 토요일 오전 훈련에도 지각하거나 결석하지 않으려고 일찍 일어나고요. 축구클럽 동생들을 어른스럽게 잘 챙기는 모습도 대견스럽죠.”
작전 회의 중인 감독님과 아이들.
문호 어머니가 말을 이어갔다. “문호가 이렇게 변해가는 건 감독님과 코치님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아이들이 잘못할 때는 따끔히 훈계하시고, 힘든 일이나 고민이 있을 때는 자상하게 이야기를 들어주시면서 정말 자기 아이처럼 바르게 지도해주셔서 감사해요. 저는 감독님과 코치님을 늘 믿고 있어요.”
어머니의 확신에 찬 목소리에서 감독님과 코치님에 대한 신뢰가 묻어난다. “두 분이 최고라고 자신해요. 아마 축구클럽의 다른 부모님들도 저와 같은 마음일 거예요. 신뢰하지 않는다면 아이들을 맡길 수 없겠죠. 1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축구클럽을 이끌어주신 감독님, 코치님 그리고 월드비전 선생님들께 정말 감사합니다.”
(좌) 월드비전 아이들과 함께 달리면서 멈추지 않는 축구공. (우) 골 세리머니도 멋지게! 득점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아이들.
드넓은 운동장을 숨차게 달리는 축구처럼 우리의 삶도 버거울 때가 있다.
승리의 기쁨도 있지만, 패배를 맞닥뜨리는 순간도 찾아온다.
친구, 누나, 형, 동생, 감독님, 코치님, 월드비전 선생님들까지
서로를 응원하고 지지하며
마음과 땀, 열정을 나누는 동안, 축구클럽 아이들은
더불어 살아내는 법을 배운다.
세상에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는 아이들,
희망의 경기는 이제 시작된다.
글. 김유진 콘텐츠&커뮤니케이션팀
사진. 윤지영 콘텐츠&커뮤니케이션팀
월드비전 동해복지관 축구클럽 노병열 감독 & 한규성 코치
매주 토요일 아침. 축구클럽 아이들을 태우고 훈련 장소로 가기 위해 월드비전 로고를 단 미니버스 두 대가 동해시 곳곳을 누빈다. 운전석에 앉아 있는 익숙한 얼굴. 바로 10년간 월드비전 동해복지관 축구클럽을 지켜온 노병열 감독과 한규성 코치다.
안녕하세요, 노병열 감독님! 10년째 든든히 축구클럽을 이끌고 계신데요.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월드비전 동해복지관 축구클럽 감독 노병열입니다. 전문 축구선수를 양성하는 지도자 생활을 25년 했습니다. 제자들 중엔 현직 감독이나 대표 선수도 있어요. 제가 월드비전 축구클럽 감독으로 활동한다는 소식을 듣고 제자들이 아이들을 위해 축구공이나 운동복도 보내주곤 해요. 10년 전 은퇴하고 동해로 왔을 때 월드비전에서 감독 자리를 제안받았습니다.
아이들 한명 한명과 눈을 맞추며 작전을 지시하는 노병열 감독.
워낙 아이들을 좋아하고, 의미 있는 자리이기에 기꺼이 하겠다고 했죠. 저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친구는 초창기 멤버였던 해인(가명)이에요. 탈북 청소년인데, 축구클럽에 다니며 운동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해서 레슬링으로 유소년 국가대표까지 했죠. 아이들이 잘 자라는 모습을 보는 것 자체가 큰 행복입니다.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활동하는 아이들의 열정이 저의 원동력이고요.
오늘도 노 감독은 “동생 미나는 왜 못 왔어~?” “손에 찬 팔찌 풀고 뛰어. 그러다 다친다!”라고 말하며 아이들 한명 한명과 눈을 맞추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등을 두드린다.
노병열 감독님의 든든한 십년지기 파트너, 한규성 코치님. 코치님의 축구클럽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월드비전 동해복지관 축구클럽 코치 한규성입니다. 두 아들이 월드비전의 후원아동이었어요. 우리 가족이 받은 도움을 조금이라도 갚고 싶어 2002년부터 동해복지관에서 사랑의도시락 봉사를 했어요. 그 인연을 계기로 코치 제안을 받아, 2008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감독님의 파트너로 축구클럽에 함께했습니다.
처음에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자신감 없는 모습이었어요. 마음의 상처와 아픔이 보였죠. 운동장을 누비며 아이들의 그늘이 걷히고 많이 웃기를 바라는 마음 하나뿐이었습니다. 감독님께서 축구 지도를 책임져주시기에 저는 아이들과 대화를 많이 나누려고 노력해요.
월드비전과 15년을 함께해왔는데요. 그 시간을 통해 제가 느낀 월드비전은 ‘나를 먼저 생각하는 세상 속에서 남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축구클럽 아이들에게도 이런 마음을 심어주고 싶어요.
나눔을 실천하는 아버지, 한규성 코치를 보며 후원아동이던 두 아들도 특별한 꿈을 키워가고 있다. 간호학과에 다니며 해외 의료봉사를 준비하는첫째, 그리고 사회복지를 전공하는 둘째. 월드비전을 통해 피어난 사랑은 값진 열매를 맺어가고 있다.
아이들에게 바라는 건 별거 없어요.
축구를 통해 자신감을 되찾고
잘 자라서, 길 가다 마주치면
서로 밝게 웃으며 인사하는 것.
그거 하나예요.
저희 둘이 매주 미니버스로 마을을 돌며
아이들 한명 한명을 태우고 훈련하는
묵호초등학교로 와요.
왜 운전까지 직접 하느냐고
놀라는 분들도 많죠.
지도자가 진심을 다해 모든 걸 바치지
않으면 아이들은 따라오지 않아요.
진심이 통해야 아이들도 신뢰하죠.
필드 안에서도 밖에서도,
아이들에게 든든한 지도자가 돼주는 것.
저희의 바람이고 꿈입니다.
노병열 감독 & 한규성 코치
글. 김유진 콘텐츠&커뮤니케이션팀
사진. 윤지영 콘텐츠&커뮤니케이션팀
월드비전 동해복지관
축구클럽 1기 창단 멤버인 스무 살 부일이.
열일곱 살 둘째 용일이와 열여섯 살 셋째 성일이.
그리고 최초의 여자 선수이자 팀의 주장인
열네 살 막내 승현이까지.
푸르른 운동장 위에서 4남매를 만났다.
월드비전 동해복지관 축구클럽 전승현 아동
운동장을 누비던 초등학생 꼬마
부일이는 어느새 군입대를 앞둔
스무 살 청년이 되었다.
어릴 때는 자신감이 없었어요. 축구 연습할 때도 맨날 뒤로 빠져 있었죠. 축구클럽에서 형, 친구들이랑 같이 축구하고 땀 흘리고 어울리면서 점점 밝아지고 자신감도 생긴 것 같아요. 소심했던 성격이 가장 많이 변했어요.
아버지가 젊었을 때 시 대표 축구선수도 하셨대요. 아빠를 닮았는지 저희 남매도 다들 축구를 좋아해요. 아홉 살 때 동해복지관에 축구클럽이 생겼는데요, 그때부터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활동했어요. 월드비전 전국 축구팀들이 모여서 친선경기를 했는데, 그때 제가 첫 골을 넣었거든요. 그 순간이 제일 기억에 남아요. 둘째, 셋째 동생 그리고 막내 승현이까지 월드비전 축구클럽에 다니고 있어요.
혹시나 운동하다 다치진 않을까 항상 걱정되지만, 너무 즐거워하고 좋아하니까 지켜보는 저도 좋죠. 감독님이 시간 될 때 주말에 나와 아이들을 도와달라고 하셔서, 저도 틈틈이 가고 있어요. 연습 상대도 돼주고, 패스 훈련하는 것도 돕고. 소심했던 제가 이제는 누군가를 돕는 사람이 되었다는 게 참 신기하고 감사해요.
오빠들을 보러 축구클럽에 따라나서곤
했던 막내 승현이도 이제는 어엿한
팀의 주장이다.
처음에는 오빠들이 매주 토요일마다 축구클럽에 가니까 저도 따라갔어요. 그때는 다 남자아이들만 있었는데, 경기하면서 실컷 뛰고 골 넣으면 같이 환호하는 모습이 너무 재미있어 보이더라고요. ‘나도 같이 축구하고 싶다’ 생각하다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축구클럽에 다니게 됐어요.
벌써 4년이 됐죠. 토요일마다 일찍 일어나서 훈련받으러 가지만 힘들지는 않아요. 아이들이랑 같이 협동해서 달리는 게 좋거든요.
얼마 전에는 감독님께서 칭찬도 해주셨어요. “승현이, 발재간이 좋다”라고요. 기분이 무척 좋았어요. 지금은 제가 우리 팀 주장인데요, 어린 동생들이 말을 잘 안 들을 때는 조금 힘들어요. 공도 안 치우고 장난만 치고. 그래도 동생들이 웃고 뛰는 모습을 보면 행복해 보여서 저도 덩달아 행복해져요. 어른이 돼서도 이 시간이 기억에 많이 남을 것 같아요. 동생들이랑 연습 열심히 해서 우리 팀이 하는 경기는 모두 우승하면 좋겠어요. 그런 날이 오겠죠?
축구로 하나 되어 자라는 4남매를 보며
엄마는 그저 신기하고 뿌듯하다.
축구대표팀 경기가 있는 날이면 4명이 쪼르르 TV 앞에 앉아 있어요. 골이 들어가면 같이 소리치고, 지면 같이 아쉬워하고.(웃음) 축구하다 다치지 않을까 걱정도 되지만,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면 참 뿌듯해요.
막내 승현이는 꿈이 축구선수래요. 저는 아이들이 커서 사회복지사가 되면 좋겠거든요. 월드비전 선생님 그리고 감독님, 코치님과 10년을 함께했잖아요. 그동안 받은 사랑과 응원을 아이들이 자라서 세상에 전했으면 하는 바람이죠. 그래도 우리 딸은 축구가 최고래요.
엄마는 눈에 띄게 바뀐 아이들의 모습
자체가 큰 행복이다.
축구클럽을 통해 아이들의 달라진 점이요? 좋아하고 이루고 싶은 꿈이 생겼다는 것, 매주 토요일을 기대하는 이유가 생겼다는 것 아닐까요? 아이들의 표정이 정말 달라졌어요. 엄마로서 이 변화가 얼마나 큰 의미인지 잘 알고 있어요. 아이들에게 이런 기회를 선물해주신 후원자님들께 감사하다고 꼭 전하고 싶어요.
축구로 똘똘 뭉친 4남매.
투닥투닥 싸우다가도 ‘축구’ 이야기만 나오면 하나가 된다.
글. 김유진 콘텐츠&커뮤니케이션팀
사진. 윤지영 콘텐츠&커뮤니케이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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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월드비전 전국 축구클럽 운영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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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비전 동해복지관 축구클럽
10년간의 희망 발자국
친구들과 공을 차며 아이들은 몸으로, 머리로, 가슴으로, 협력과 소통을 자연스럽게 익힌다. 작은 가슴에 얼마나 쌓였을지 가늠할 수 없는 아픔도 이 시간만큼은 공과 함께 뻥, 날려버리고 바람을 느끼며 달리고 또 달린다.